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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9 | 연재 [클래식 뒷담화]
자연을 거역하고 얻은 아름다움, 카스트라토
문윤걸 예원예술대학교 문화영상창업대학원 교수(2013-09-02 17:39:51)

우리와 서구 사람들은 생각에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서구 사람들은 자연을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에베레스트산 정상에 최초로 올라간 사람, 남극이나 북극을 최초로 정복한 사람 같은 이들이 영웅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닌 더불어 살아가야 할 대상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을 인간의 욕망에 맞게 바꾸어가는 서구인들과 달리 자연을 있는 그대로 두고 우리의 삶을 자연에 맞추어가며 살아갑니다.
이처럼 서구인들이 인간의 욕망에 맞게 자연을 바꾸어간 사례가 음악에서도 나타납니다. 카스트라토(castrato, 또는 evirato)가 그런 경우입니다. 카스트라토는 라틴어의 동사 castrare(거세하다)에서 나온 말입니다. 남자아이가 변성기에 이르기 전에 거세해서(여기서 거세란 고환만을 절제한 경우로 내시나 환관의 경우와는 다른 경우입니다. 그래서 카스트라토는 결혼한 사람도 많습니다) 인위적으로 소년의 목소리를 간직하도록 만든 경우를 말합니다.
카스트라토는 인간을 새로운 악기로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소년시기에 거세를 하면 남성호르몬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성대의 순이 자라지 않아 맑고 청아한 소년 목소리를 그대로 유지하는 반면 가슴과 허파는 성장을 계속해서 어른과 같이 되기 때문에 소년과는 다른 힘있고 볼륨감있는 소리를 만들어주게 됩니다. 이른바 ‘하이브리드 성대’를 갖게 되는 것이지요. 또 성장판이 일찍 닫히지 않아 키나 팔다리가 길어져 보통사람보다 체구도 커졌구요.
보통 카스트라토가 등장하게 된 연유로 교회의 역할을 지적합니다. 교회는 오래전부터 하느님을 찬양하는 음악은 악기로 연주하지 않고 사람 목소리로만 해야 한다고 정해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 바울로(바울)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코린토전서 14장 34절)”고 했다는 성경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해 여성들의 노래를 금지합니다. 이 때문에 여성의 고음역을 대신해줄 남성이 필요했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 잘하는 소년에게 그 역할을 맡긴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카스트라토가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카스트라토가 비약적으로 늘어난 것은 교황 클레멘트 8세(Clement VIII, 1535~1605, 이교도들의 음료라 비판받던 커피를 직접 맛본 후 세례를 주고 유럽인들에게 허용한 교황) 치하 전후입니다. 당시 교회는 이중적 잣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카스트라토가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다며 파문형으로 다스린다는 엄포를 놓으면서도 좋은 카스트라토들을 경쟁하듯 성가대에 고용하는 등 눈가리고 아웅하는 정책을 썼던 겁니다. 클레멘트 8세는 이러한 현실적 문제를 카스트라토를 공인함으로써 해소했습니다. 그러자 카스트라토들이 대거 양성되었습니다.
이 시기 카스트라토들이 대거 양성된 이유는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입니다. 어디나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뒤따르기 마련이지요. 첫 번째 수요는 오랫동안 카스트라토를 고용해 온 교회였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점차 대형화되고 유능한 작곡가들이 다채로운 성악곡을 작곡하면서 그만큼 유능한 성가대원들이 필요했고, 교회는 카스트라토들을 대거 고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이 소년 성가대에서 빼어나게 노래를 잘해서 카스트라토가 될 뻔했으나 아버지가 이를 막았다고 합니다). 두 번째 수요처는 바로 1597년 시작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오페라였습니다. 그 시대에 가장 즐거운 오락거리였던 오페라는 카스트라토들의 독무대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카스트라토만큼 드라마틱하게 노래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카스트라토는 흔히 소년의 미성, 즉 보이 소프라노 같았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카스트라토들의 신체는 건장한 남성이었기에 충분한 호흡이 뒷받침되어서 매우 파워풀한 소리를 낼 수 있었습니다. 고음에서 곱지만 힘있는 소리는 양성적 매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고운 목소리만으로 승부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훈련을 통해 목소리로 할 수 있는 모든 기교와 그 기교를 뒷받침하는 근육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보통 6년에서 10년에 이르는 수련기간을 거치는데 제일 중요한 훈련은 호흡법이었습니다(노래하는 사람에게는 호흡이 가장 중요하지요. 노래란 결국 호흡에 얹어서 내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호흡을 제어하는 근육을 최대한 발달시켰으며 일반적인 복식호흡을 넘어 늑골을 최대한 활용하는 깊은 복식 호흡법을 익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호흡량을 확보하고 그 호흡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도록 훈련했습니다. 이 훈련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두 옥타브를 넘나드는 넓은 음역에 엄청난 성량을 가질 수 있었으며 여기에 트릴이나 파사지오, 메사 디 보체 등 성악과 관련한 초절기교들을 완벽히 습득해 인간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소리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들은 교회음악 때문에 등장했지만 폭발적인 성장은 오페라의 발전과 맥을 같이 합니다. 당시 오페라는 수많은 대중들이 열광하던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최고의 노래실력을 갖춘 카스트라토들을 오페라 기획자들이 그냥 놔둘 리 없었지요. 오페라 무대에서 카스트라토들은 물 만난 물고기 같았습니다. 이들은 1500년대 후반부터 1700년대 후반까지 200년간 유럽의 무대를 휩쓸었습니다(18세기 모든 남성 오페라가수 중 70%가 카스트라토라는 통계가 있을 정도입니다. 바로크 시대의 오페라는 카스트라토에 의해, 카스트라토를 위해 존재한 것이었습니다. 헨델도 카스트라토를 위한 오페라를 여러 편 작곡했습니다).
카스트라토가 오페라 무대에서 얼마나 빛나는 존재였는지를 보여주는 기사들은 수없이 남아있습니다. 카스트라토들의 아리아가 한 곡 끝날 때마다 관객들은 박수갈채를 보내고 꽃을 던지고, 애정담긴 편지도 던지는 등 열광했습니다. 심지어는 좋아하는 카스트라토의 얼굴이 찍힌 뱃지를 달고 다니는 유행이 생길 정도였으니까요. 그들은 돈과 명예를 누리는 최고의 스타인 동시에 막강한 음악계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카스트라토였던 파리넬리는 노래로 스페인 왕 펠리페 5세의 우울증을 치료해 요직에 앉아 정치에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카스트라토가 각광을 받자 수많은 아버지들이 아들을 카스트라토로 만들었습니다(오늘날 자녀를 인기 스타로 만들려는 것과 비슷하죠). 이탈리아에서만 해마다 6,000여명이 카스트라토가 되었지만 성공한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대부분은 화려한 오페라 무대에 한번 서보지 못하고 비참한 삶을 꾸려가거나 한을 품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남성다운 근력도 부족하고 노래만 훈련한 그들에게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카스트라토는 1700년대 중엽에 이탈리아에서 최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후 나폴레옹이 1799년 이탈리아 시칠리아를 점령하면서 카스트라토를 금지하고 카스트라토 양성학교의 문을 닫아버렸습니다(근데 앞뒤가 다르게 나폴레옹도 크레센티니라는 카스트라토에게 반해 그를 황실 음악교사로 파리에 데려갔습니다). 또 마침 그 무렵 서양음악의 음악적 풍토도 변화하였습니다. 이탈리아 음악은 천박한 음악으로 인식되면서 기존의 오락적 오페라는 주춤하고 대신 예술적 감성이 담긴 오페라나 교향곡 같은 관현악과 악기연주 중심의 공연이 음악의 중심에 서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관객들은 기교 위주의 창법보다는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목소리를 더 원하게 된 것입니다.
카스트라토들은 급격히 설자리가 없어졌습니다. 그들은 오페라무대를 떠나 다시 가톨릭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가톨릭교회에는 20세기 초까지 카스트라토들이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그 수는 극히 미미했고 1924년 마지막 카스트라토가 사망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바로크시대에 작곡된 오페라 중 카스트라토들이 불렀던 노래들은 오늘날 여성 소프라노나 알토가 부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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