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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 | 연재 [클래식 뒷담화]
적과의 동침, 스탈린과 쇼스타코비치
문윤걸 예원예술대 문화영상창업대학원 교수(2013-10-10 10:05:59)

살다보면 너무나 싫은 사람과 함께 살아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라면이는 더더욱 끔찍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음악사에도 이런 끔찍한 일들이 있습니다. 이런 끔찍한 일들은 음악이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는 상황에서 주로 생겨납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붉은 혁명인데요.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등장한 것입니다. 이 혁명을 주도한 레닌이 집권하면서 러시아에서는 황제시대를 능가하는문화적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러시아의 예술가들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행하던 아방가르드를 들여오는 등 러시아의 예술계를 풍요롭게 가꾸어 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풍요로움은 그리 오래가지못했습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하고 스탈린이 뒤를 이으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 등 정적을 제거하고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갖게 되었습니다. 스탈린은 집권 초기부터 전형적인 독재자의 길을걸으며 자신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정치범으로 몰아 수십만명을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보냈으며, 수많은 사람을 처형하고 3천만명을 숙청하는 등 소비에트연방(소련)을 공포의 땅으로 몰아갔습니다.이 시기 소련에는 뛰어난 음악가들이 있었습니다.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에프, 하차투리안 등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서구 유럽에까지 널리 알려진 소련 음악계의 보석들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쇼스타코비치는 발군의 음악가였습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i Shostakovich, 1906~1975), 19세이던 192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졸업 작품으로 쓴 <교향곡 1번>이 유명해지면서 유럽의 촉망받는 신예 작곡가로 인정받은동시에 쇼팽콩쿠르의 본선까지 진출하는 등 피아니스트로서도 그재능을 인정받았습니다. 발표하는 곡마다 평단의 주목을 받았고 그결과 1932년 소비에트 작곡가 동맹 레닌그라드 지부 운영위원으로선출되는 등 소련에서 가장 촉망받는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어느 날 스탈린의 눈밖에 나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천당과 지옥을오가게 됩니다. 1934년, 쇼스타코비치는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을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동시에 무대에 올려 소련인민들의 큰 사랑을 받았음은 물론 유럽과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모았습니다. 2년이 흐른 1936년 1월의 어느 날 소련공산당기관지인 프라우다에 ‘음악이 아닌 혼란’이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렸는데그 내용은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은 음악이 아니라 횡설수설하는 음표더미들이며 퇴폐적이고 부도덕하며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어긋나는 부르주아의 감각주의, 형식주의의 산물’이라는 신랄한 비판이었습니다. 2년 내내 별탈없이 공연해왔고 대중에게 사랑받았으며 유럽과 미국의 음악계에서도 찬사를 받았던 작품이었는데 프라우다의 비판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어찌된 사연이었을까요?
사연인즉 사설이 실리기 전날 이 작품의 유명세를 들은 스탈린이공연을 보러 왔습니다. 그런데 한창 공연이 진행중인데 화를 버럭내며 자리를 떴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작품에는 여주인공이 불륜관계에 빠지며 남편과 시아버지를 독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암살을 두려워했던 스탈린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었습니다. 프라우다가 비판하고 나서자 음악비평가들이나 동료음악가들도 모두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10일 뒤에는 프라우다에 쇼스타코비치의 또다른 작품인 발레음악 <밝은 냇물>에 대한 비판이 실렸습니다(음악계에서 이 사건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논쟁의 첫 번째 사건이었습니다).
스탈린의 심기를 건드린 사람들이 정치범으로 몰려 숙청되는 것을 지켜본 쇼스타코비치는 굉장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는 새로발표하기위해 리허설까지 마친 <교향곡 4번>의 공연을 취소하고새로운 작품 <교향곡 5번>을 준비했습니다(교향곡 4번은 짙은 고독과 염세적인 분위기의 음악으로 ‘타락한 부르주아 음악’으로 평가되어 자칫하면 숙청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1년 후<교향곡 5번>을 서둘러 무대에 올렸는데 이 작품이 그 유명한 <혁명>입니다(이 교향곡은 우리 나라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금지곡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혁명이라는 부제 때문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소련의 밝은 미래 비전을 들려주고 있다는 대찬사를 받았습니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에 대해 ‘정의로운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예술가의 응답’이라는 평을 내리며 쇼스타코비치를 복권시켜 주었습니다(초연당시 청중들은 연주시간이 45분인 이 교향곡이 끝나자연주시간보다도 더 긴 1시간이 넘도록 박수를 보냈답니다).더욱이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해 레닌그라드가 포위되자 많은 지도자들이 피난갔지만 오히려 쇼스타코비치는 시력 때문에 군입대가 거절되었는데도 끝까지 방공감시원으로 레닌그라드를 지켰습니다. 세계적인 작곡가의 이러한 모습 때문에 그는 나치에 대항하여조국을 지키는 위대한 작곡가라는 칭송을 받으며 소련인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1942년에 발표한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는 히틀러의 레닌그라드 침공에 대항하는소비에트 인민들의 투쟁과 승리를 그린 작품이라는 설명과 함께 전세계에 알려졌고 타임지 표지모델이 되는 등 소련을 넘어 연합국의영웅으로 부상하였습니다. 이로써 쇼스타코비치의 불행은 끝나는듯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큰 위험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스탈린이 새로운 욕심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스탈린은 어느 날 쇼스타코비치를 불러 새로운 교향곡을 작곡하라고 명령합니다. 스탈린의 속내는 전 세계가 인정하는 위대한 작곡가가 2차대전의 승리와 그 승리를 이끌어낸 자신을 칭송하는 내용으로 베토벤의합창에 버금가는 교향곡을 만들어서 바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교향곡을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이 <교향곡 9번>입니다. 이 작품에는 합창도 독창도 찬가도 없었으며 스탈린에게 바치는 헌사도 없었습니다. 웅장하고 장엄한 곡을 기대했지만 때로는 빈정대고 슬퍼하고 때로는 앙증맞은 발랄함만 있었던 것입니다. 스탈린은 격분했고 이에 스탈린의 예술고문 안드레이 즈다노프는 1948년 악명높은 즈다노프의 비판으로 쇼스타코비치를 부르주아 미학을 형상화했다며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음악원교수에서 해임되었으며 대부분의 작품이 금지곡이 되었고 숙청대상이 되었습니다(즈다노프의 비판은 전 예술계로퍼져나갔고 소련의 예술계를 깊은 암흑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후쇼스타코비치는 영화관에서 피아노를 치는 아르바이트와 당과 스탈린을 선전하는 영화들의 음악을 작곡하며 겨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1년 후 스탈린이 국토개발계획을 시행했는데 쇼스타코비치는 국토개발계획과 이를 이끄는 스탈린을 찬양하는 오라토리오 <숲의노래>를 발표했고 이 작품으로 스탈린상을 받으면서 다시 재기에성공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교향곡을 작곡하지 않고 당에 협력하는 곡들만 작곡하며 다시 소련예술의 상징적인인물이 되었습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자 비로소 쇼스타코비치는 아껴두었던 그의 재능을 마음껏 펼칩니다.이런 이유로 쇼스타코비치는 20세기 최고의 작곡가라는 찬사와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사망 후 4년이 지난 1979년 공개된 회고록을 보면 쇼스타코비치는작곡가보다 당이 음악을 더 잘 알던 시대에 음악가로서 자신이 할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소심한 복수를 계속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예로 교향곡 7번은 스탈린이 철저히 파괴하고 히틀러가 마지막 타격을 가한 레닌그라드를 애도하는 음악인데 속내를 모르는공산당과 스탈린이 이 작품을 격찬했다고 조롱하고 있습니다.모든 예술이 정치적 목적이나 개인의 우상화를 위해 사용되던 시절 쇼스타코비치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무례한 행동을 견디지 못하겠다. 무례함과 잔인함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속성이다.무례함과 잔인함은 늘 함께 붙어 다닌다. 그런 수많은 예 가운데 하나가 스탈린이다. 모든 독재자는 예외 없이 항상, 오랫동안 기다리던 새벽이 당도했다고 주장한다. 새벽은 언제나 독재자의 지배하에서 당도한다. 아직 어두운 한밤중인데 사람들은 마치 새벽이라도당도한 듯이 코미디를 연기한다.” 이 말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서는폐기해도 좋은 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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