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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 | 연재 [서평]
사실(史實)에 사실(事實)이 접합하는 데칼코마니
『홍도』 김대현 지음/ 다산책방
문신 시인(2013-11-05 15:19:58)

제3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홍도』를 읽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간의 층위를 넘나들어야 한다. 우선 소설 속 중심 사건들이 수백 년의 시간을 단숨에 건너뛴다. 거기에 헬싱키 반타공항에서 인천공항까지 비행하는 시간은 소설 속 화자의 서술 지점에 놓이고, 독자들은 각자의 현재 속에서 독서 시간을 구성한다. 그러다보니 『홍도』는 이야기들이 첩첩한 시간의 지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시간의 지층은 단층을 형성하면서 어긋나기 일쑤다. 그 어긋남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것, 그것은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각별히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고도의 읽기 전략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소설은 우선 잘, 그리고 격정적으로 읽히는 매력이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제대로 혹은 맵시 있게 읽어내는 것은 생각만큼 간단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근대적 인간 본위의 사고와 자연이라는 큰 우주 속의 한 부분으로 인간을 위치시키는 전근대적 주술적 믿음 사이의 갈등을 기묘하게 병존시키면서 소설 전체는 한결 역동적이고 이채로워졌다”는 심사평의 한대목을 참고삼아 『홍도』 읽기의 가능한 방법을 찾아봐도 좋을 듯하다. 심사평은 이 소설이 독자들의 ‘믿음’을 기반으로 성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안내하고 있다. 그렇다. 『홍도』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 독자들만이 읽을 수 있고 또 읽어야 한다.


믿음 하나: 사실(史實)적 사료로서의 스크랩북
역사적 사실과 허구적 상상력이 결합한 팩션(faction)의 예술 형식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 대중적 영향력을 확인한 이래 소설, 특히 장편소설에서 팩션은 보편적인 창작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일단 이야기의 중심적인 갈등 양상이 주어져있다는 점에서 사건 전개의 개연성 확보가 용이하다. 그래서 팩션 소설은 사건의 개연성보다는 작가가 새롭게 해석해낸 사실(史實)과 창조적 상상력이 성패를 좌우한다.
소설 『홍도』는 정여립 모반사건을 이야기의 씨앗으로 삼았다.
동현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정리해놓은 스크랩북은 ‘홍도’라는 인물을 소설 속으로 끌어들이는 역할과 함께 다양한 역사적 사실들을 이야기 속으로 소환하게 한다.
“만져보고 싶다. 눈으로 반하면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공책을 만지려던 여자는 그제야 인쇄된 글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공책 표지에 인쇄된 글자들은 ‘천반산(千盤山) 죽도서실(竹島書室)’. 정여립이 모반을 획책했다는 공간이다. 스크랩북 표지인 일곱 글자는 정여립은 물론 소설 속 인물들의 운명을 점지한 괘처럼 읽힌다. ‘천반’이란 하늘을 기반으로 삼는다는 뜻 혹은 하늘을 떠 받든다는 그 어름의 의미이리라. 그 뜻풀이가 어떠하든 ‘하늘’이라는 정치적, 이념적 세계를 획책하지 않을 수 없게 생겼다. ‘죽도’는 어떠한가! 대숲 우거진 섬이든 섬처럼 우거진 대숲이든 고립의 상징을 벗어내기 힘들다. 하늘이라는 이상적 세계를 꿈꾸는 자의 현실적 공간이 섬이라고 하는 유폐와 고립의 세계로 설정된 것은 필연적으로 참담한 좌절을 예고하게 된다. 역사가 그랬고 또 이 소설 속 인물이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크랩북은 역사적 사실의 세계를 견고하게구축한다. 그것은 소설이 역사적 고증을 통해 확보한 실제라는 믿음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그것을 믿는 독자라면 이 소설을 기어이 독파하고 말겠다는 신념을 줄 것이다.

믿음 둘: 사실(事實)적 매개로서의 자치기 알
이병천 소설가의 지적처럼 “이 허무맹랑한 얘기가 제발 사실이기를, 하는 심정으로 책장을 넘길 만큼 소설 『홍도』는 절실해서 좋다.” 주인공 ‘홍도’가 400여 년이 넘도록 살아 있다는, 시간의 물리적 개념을 무너뜨리는 장쾌한 상상력은 이 소설의 핵심 모티프다. 인간의 유한성이라고 하는 보편 법칙마저 간단하게 뒤집어버리는 상상력이 다소 위태롭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어쩌랴! 본디 소설이란 견고한 우리의 사유체계에 미세하게 균열을 일으키는 것을 재미의 본질로 삼고 있는 것을.

“어쩌라고…… 동현은 이 모든 것이 홍도의 연기라고 해도 좋고, 눈앞에 있는 홍도가 정말로 사백서른세 살 먹은 여자라고 우겨도 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어쩌지? 어떡하면 좋지? 여자가 흘리는 눈물은 남자를 순간적으로 얼게 만든다.”

믿음은 여자의 눈물처럼 순식간에 차올라 넘친다. 일단 믿기로한 이상, 이 소설은 그대로 사실(事實)이 된다. 중국의 항아설화를 끌어들여 홍도에게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는 삶을 부여한다는 설정은 400년을 뛰어넘는 이야기 단층을 엄청난 압력으로 밀착시킨다. 임진왜란으로 피란길에 올랐던 군주와 그 가솔들이 자국 백성들에게 저지른 만행은, 설령 그것이 소설적 허구라고 하더라도, 위정자들의 윤리와 진정성을 의심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진실의 통렬함을 불어넣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소설 『홍도』의 그럴듯함, 개연성, 사실적 믿음을 완성할 수는 없다. 소설의 심층 영역에서 역사를 통해 창조된 인물 홍도와 자치기,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전달하고 서술하는 홍도와 동현의 관계가 독자들에게 양해되지 않는다면, 이 소설은 ‘허무맹랑한 얘기’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허무맹랑함을 포용할 수 있는 사실적 ‘절실함’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홍도』는 이러한 허무맹랑함을 벗겨낼 절실함을 찾아가는 독서법이 요구된다. 남녀 주인공이 400여 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맺는 인연의 단서이자 마지막 매듭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것! 바로 그절실함이 이 소설을 사실(史實)의 세계에서 사실(事實)의 세계로, 400여 년 전 이야기에서 오늘의 이야기로, 그리고 작가의 믿음에서 우리들의 믿음으로 이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소설 『홍도』에서 사실(史實)과 사실(事實)이 교묘하게 접합하는 믿음의 데칼코마니, 즉 어떤 절실함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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