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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 | 연재 [클래식 뒷담화]
로시니, 그보다 더 행복한 음악가는 없었다
문윤걸 예원예술대 문화영상창업대학원 교수(2013-12-09 17:08:03)

세상에는 두 가지 형 인간이 있다고 합니다. 비관파와 낙관파. 심각한 일이 닥쳤을 때 누구는 그 상황에서 부정적인 생각부터 떠올리고, 누구는 긍정적인 생각을 먼저 한다지요.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음악사가들이 꼽는 최고의 낙관파는 낭만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하나인 이탈리아 작곡가 조아키노 안토니오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 1792~1868)입니다(어떤 사가는 베토벤은 평생 두 세번 즐거웠을까 말까 했다, 그런데 이는 로시니가 평생 우울했을까 말까 한 날과 같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로시니는 우리에게 <세빌리야의 이발사>, <윌리엄텔 서곡> 같은 작품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아마 유명도로 친다면 베토벤, 모차르트보다는 한 등급 낮다고 해야겠죠. 하지만 로시니가 살았던 당대에 로시니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적과 흑을 쓴 스탕달은 로시니를 나폴레옹과 비교해 ‘음악의 나폴레옹’이라고 부르며 유럽에서 나폴레옹의 별이 떨어지니 로시니의 별이 떠올랐다고 까지 평가했습니다). 베토벤이 <9번 교향곡, 합창> 작곡을 시작하던 무렵 베토벤과 로시니가 빈에서 함께 활동했는데 베토벤도 유명했지만 빈 사람들은 로시니의 오페라에 더 열광했다고 합니다. 베토벤이 로시니를 피해서 연주회장을 잡아야 할 정도였답니다(로시니는 베토벤의 음악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베토벤을 만나러 찾아 갔는데 가난하게 생활하는 베토벤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지요).
로시니는 모차르트가 사망한 다음 해에 태어났는데 모차르트에 버금가는 음악신동이었습니다. 로시니의 부모는 둘 다 음악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직업이 두 개였는데 하나는 도살장의 감독관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방극장의 트럼펫주자였습니다. 어머니는 아주 실력있는 소프라노 가수였구요. 하지만 로시니의 부모는 로시니에게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로시니는 어깨너머로 배운 실력으로 12살 되던 해에 클래식음악 중 가장 까다롭다는 현악 4중주곡을 작곡했습니다. 또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기다리는 짧은 순간에 뚝딱 작품 하나를 써내기도 했습니다. 14세에 볼로냐 음악원에 입학했는데 입학하자마자 첫 오페라 <도메트리오와 폴리비오>를 작곡하여 발표했고, 채 20살이 되기도 전에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에 올랐습니다(<세빌리야의 이발사>는 24살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사람들이 로시니의 작품을 좋아했던 것은 로시니의 작품들이 성악에 기초한 수려한 멜로디 라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로시니의 낙천적이고 쾌활한 성격이 작품에서도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일단 당시 유럽인들은 프랑스대혁명으로 지속적인 사회적 변혁을 격은 탓에 심각하고 진지한 내용의 오페라보다는 통속적이고 희극적인 스토리라인을 좋아했고 무겁고 비극적인 오페라(오페라 세리아)보다는 다소 코믹하고 유쾌한 오페라(오페라 부파)에 열광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객의 성향이 로시니의 성격과 잘 맞았습니다. 로시니는 작품 안에서 음악적으로 뛰어난 기교를 바탕으로 타고난 익살과 재치를 발휘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로맨틱 코미디에서 주인공들이 재치있는 대사로 인기를 모으듯 로시니 역시 사랑스럽고 발랄한 음악적 재치가 넘치는 로맨틱 코미디 오페라의 대가였던 것입니다.
그의 오페라는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빈, 파리, 런던 등 당시 유럽음악의 본고장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더불어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37세가 되던 어느 날 갑자기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비록 로맨틱 코미디 오페라를 주로 작곡하던 20대 때의 인기만은 못했지만 20대 후반부터 주로 작곡하기 시작한 대하 사극형 오페라도 크게 주목받고 있었는데 그가 왜 은퇴를 선언했는지는 지금까지 미스테리로 남아있습니다(37세까지 남긴 오페라가 무려 38개입니다. 이는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가 칠십 평생 동안 작곡한 작품수와 비슷합니다). 로시니는 이후 간간히 소품을 내놓긴 했지만 오페라는 전혀 작곡하지 않았습니다.
로시니의 은퇴에 대해 음악사가들은 수많은 이유를 들이 댑니다. 첫 번째 이유는 로시니는 오랫동안 관객들이 좋아하는 희극오페라를 주로 작곡했는데 어느 날 이후 갑자기 보다 진지하고 깊은 내용의 오페라들을 작곡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많은 관객들이 로시니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라는 설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대부분의 로시니 작품은 뛰어난 성악가만이 부를 수 있는데 이러한 성악가를 찾는 것에 애먹어서 그만두었다는 설입니다. 실제로 로시니의 작품에서 노래하다가 목을 다쳐서 은퇴한 성악가들도 많았습니다. 로시니는 본래 성악가로 출발했다가 목을 다쳐서 작곡가가 되었던 만큼 노래에 대한 탁월한 안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악가들의 훈련을 직접 담당했는데 이전의 어떤 오페라에서도 볼 수 없었던 어려운 기교를 요구하고 음역 또한 초고음역대를 주로 사용하여 오페라 가수들의 원성이 자자했습니다(로시니의 첫 번째 아내가 유명한 소프라노였는데 남편이 자신을 위해 작곡한 오페라 <세미라미데>를 부르다 성대를 다쳐 비극적으로 은퇴하였고 결국 사이가 나빠져 이혼했답니다).
세 번째 이유는 건강이상설입니다. 너무 많이 먹어서 통풍에 걸렸다는 설, 너무 어릴 때부터 음악가로 활동하면서 신경계통에 이상이 생겼다는 설, 심지어는 1830년 7월 혁명이후 허무주의에 빠져서 정신적 무기력증에 빠졌다는 설 등입니다. 이는 근거가 없는 듯합니다.
네 번째 이유는 그가 식도락에 미쳐서 음악을 내팽겨쳤다는 설입니다. 로시니는 당대에 유명한 미식가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가 특히 좋아했던 음식이 ‘송로버섯’(트뤼프, truffle)입니다. 송로버섯은 푸아그라(거위 간), 캐비어(철갑상어 알)와 함께 3대 진미로 꼽는 식재료라는데 ‘악마의 음식’(유황같은 독특한 냄새때문), ‘검은 다이아몬드’(비싼 가격때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공재배가 불가능하고 생장과정이 밝혀지지 않아 훈련된 돼지나 개를 이용해 땅속에 묻혀있는 버섯을 냄새로 찾아 채취할 만큼 신비로운 식재료로 알려져 있습니다(그래서 한동안 로시니가 음악을 버린 이유가 송로버섯을 채취할 돼지를 키우기 위해서라고 소문이 나기도 했습니다).
로시니가 송로버섯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로 로시니가 평생 흘린 세 번의 눈물중 첫 번째는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세비야의 이발사>의 초연이 관객들의 난동으로 엉망이 되었을 때고, 두번째는 어린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그리고 마지막이 세느강에서 보트를 타다 송로버섯요리를 강물에 빠뜨렸을 때였답니다.
로시니의 음식 탐은 단순히 먹는 데만 그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음식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새로운 요리들을 개발하고 미식가들을 위한 요리 안내서를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까지 로시니의 이름을 딴 메뉴가 7개가 남아 있답니다(프랑스 요리 중 송로버섯요리인 <알라 로시니>, 거위간과 송로버섯을 곁들인 프랑스 최고급요리 <투르네도 로시니 스테이크> 등).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로시니의 이름을 딴 요리대회(2010년 3월, 마체리타대학이 주최하는 ‘조아키노 로시니 미식 국제경연대회’로 요리전공자들이 요리에 로시니의 음악을 가미하고 변주하며 실력을 겨루는 경연대회, 상금 1천유로)가 개최되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를 기념하기 위해서 작품을 헌정하거나 음악 콩쿠르를 헌정하는 경우는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리대회를 헌정받은 음악가는 로시니뿐 아닐까요?
음악천재로 태어나 76세를 살면서 평생 최고의 인기와 부를 축적하였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다가 그만두고 싶을 때는 거침없이 그만둘 수 있었던 최고의 팔자를 누린 로시니, 이는 그의 낙천적인 성격 탓일까요? 아니면 그래서 낙천적일 수 있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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