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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 | 연재 [읽고 싶은 이 책]
이것도 시인가? 외 4건
임주아 기자(2013-12-09 17:13:36)

이것도 시인가?
< 구관조 씻기기> 황인찬 지음/ 민음사
 잠시 눈을 의심했다. ‘뭐지. 이것도 시인가.’ 렘브란트의 회화를 보다가 뒤샹의 <샘>을 본 기분이었다. 기존 형식을 파괴했거나 난해한 문법으로 쓰여졌다면 어떻게든 이해해보려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였다. 이 시집을 다 읽고 떠오른 한줄 소감은 ‘단순함의 충격’이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시를 읽을 때면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를테면 이런 얼굴이다. 물탱크가 있다/ 환기구가 있다/ 창문이 있다/ 5층의 건물이 있다/ 간판이 있다/ 전신주가 그 앞에 있다/ 내가 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내가 있다/ 무작정 올라갔더니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지나가면/ 옥상이 있다/ 거기에는 물탱크가 있다/ 푸른 물탱크가 있다(‘개종2’, 37쪽)
황인찬의 시는 대개 이런 모습이다. 수사도 없고 가식도 없다.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박상수는 “거의전편이 고른 완성도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시간의 풍화에 저항하겠다는 듯 담백하면서도 유려하게 제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고 평했다. 한편 더 읽어보자.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무화과 숲’, 104쪽)
시집 한권 내지 않은 신인인 그가 지난 해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해 문단 안팎에서 화제가 됐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잘 읽히는 시가주는 또 다른 질문에 고민을. 주목받는 신예의 치열한 결과물, 부디 소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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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발자취
<퓰리처상 사진> 헬부엘 지음/ 박우정 옮김/ 현암사
“당신은 뷰파인더를 보면서 테크니션이 되려고 노력할 테지만, 때때로 그 뷰파인더가 눈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스탠 그로스펠드(1984, 1985 수상)
퓰리처상을 수상한 지난 70년간의 모든 사진들을 한 권에 모은 책. 1942년의 첫 수상작부터 현재까지 특종사진과 특집사진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수상한 사건과 사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전 세계 현대사를 압축하여 ‘목격’하는 듯한 사진들, 촬영 과정의 이야기를 다각도에서 들려주는 설명도 읽기 좋다. 태평양전쟁당시 이오섬의 성조기 게양부터 베를린 장벽 붕괴, 세계무역센터 붕괴, 미국이 벌인 이라크 전쟁을 비롯해2011년 아이티 지진과 로스앤젤레스 폭동이 남긴 상처에 이르기까지, 퓰리처상은 우리의 의식 속에 남아 있는 역사적 순간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어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한 장의 사진. 기자의 참혹한 발자취가 한권의 책으로 묶였다.
퓰리처상은 헝가리 출신 저널리스트 조셉 퓰리처의 유언으로 당시 미화 2백만 달러의 유산으로 1917년 창설되었다. 컬럼비아대학교에서창설해 주관하는 퓰리처상은 저널리즘 14개 부문, 문학 6개 부문, 그리고 음악 1개 부문에서 그해 가장 탁월한 업적을 이룬 인물을 추천받아 수여한다. 하지만 상은 까다롭다. 문학 음악 부문 수상자는 꼭 미국 시민이어야 하며, 저널리즘 수상자는 꼭 미국인일 필요는 없으나 미국 신문사에서 활동해야 한다. 미국을 위한, 미국에 의한, 미국의 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포토 저널리스트 이상엽은 책머리말에서 “과거에서 오늘날까지 세계의 포토저널리즘이 어떻게 발전하고 유통되어왔는가를 이 책을 통해 목격할 수 있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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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
<다시 태어나다> 데이비드 리프 엮음/ 김선형 옮김
새로운 비평적 감수성의 시대를 연, 미국 지성계의 대모이자 전방위 문화평론가 수전 손택. 그의 탄생에 얽힌필연적 계기와 성장통에 관한 기록이 한권의책으로 세상에 나왔다.평생 백여 권이 넘는 일기를 썼지만, 일기가 그렇듯 친구나 가족들에게 공개된 적이 없었다. 2004년 12월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수전 손택은 사망하기 전 일기의 존재에관한 이야기를 아들에게 전했다고 한다. 리프는 “너무나 솔직하다 못해 고통스러운 기록이었지만 진실과 정직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손택의 뜻을 받들어” 내밀한 이야기들을 회피하거나 윤색하지 않고있는 그대로 실었다. 손택이 열네 살 소녀에서 서른살 여인이 되기까지(1947~1963) 쓴 일기다.
일기 속에는 손택에게 영향을 준 당대의 쟁쟁한 문화계 인사들이 등장한다. 대단한 야망가였던 그는버클리 대학에 들어간 1949년 겨울, 대담하게도 토마스 만을 찾아가 그와 문학을 논하는가 하면 동료학자들과 작가들, 비평가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지적 자극을 받는다. 종교 신학자 야콥 타우베스와는강의를 같이 하면서 유대인으로서 자신을 자각하는계기로 삼기도 했다. 정치인이자 사학자인 E. H. 카와 철학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손택이 하버드대학교를 다닐 때 남편 필립 리프와 함께 친분을 쌓은 사이다. 이 책을 읽은 한 네티즌은 “수전 손택의내적인 욕망과 성장과정이 잘 담겨 있다. 일기도 창조적인 기록이 된다는 걸 보여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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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속 질 것이다
<느낌의 공동체> 신형철 지음/ 문학동네
사랑할수록 문학과 더 많이 싸우게 된다. 사랑으로 일어나는 싸움에서 늘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는 잘못을 저지른 쪽이 아니라 더 많이 그리워한 쪽이다. 견디지 못하고 먼저 말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야 다시 또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진다. 나는 계속 질 것이다.(12쪽, 책머리에) 총 6부로 나눠 담은 이 책은2006년 봄부터 2009년 겨울까지 쓴 글을 모은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첫 번째산문집이다. 책머리에서 그는 “산문시를 꿈꾼 적이 없는 산문은 시시하다. 김훈의 <풍경과 상처>나 롤랑바르트의 <사랑의 단상>과 같은 극소수의 책들만이그 꿈을 이뤘다”고 적었다. ‘아직은 그냥 산문’이라 말하는 겸손한 그지만 글까지 겸손하지는 않다. 그의 첫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도 함께 읽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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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발언
<정치적인 것을 넘어서> 김정헌 외 엮음 / 현실문화
군부 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1980년 10월, 미술계에는 <현실과 발언> 동인(미술가 임옥상 윤범모안규철 김정헌 등)이 있었다. 여러 차례의 연례전과 책자 발간, 회원들의 창작, 미술교육, 평론 활동, 미술운동 조직에의 참여 등을 통하여 80년대민중미술의 성장에 큰 몫을 담당해온 <현실과 발언>. 그로부터 30년 뒤, 그들의 직접적인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는 젊은 미술계 연구자들이 그들의 행보를 새롭게 조명했다. 특히 90년대 이후로도 미술계에서 여전히 중요한 화두인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의미를 탐색하는 데 풍성한 맥락을 제공하고 있어 흥미롭다. 우리나라 현대미술사를 깊이 있게 알게 해주는 책이자현실을 피하지 않는 예술가의 투명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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