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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9 | 연재 [72회 백제기행]
민족의 숨결이 살아있는 땅, 고구려!
중국기행
김갑순 고산고등학교 교사(2014-04-28 15:00:34)

하늘은 맑고 푸르다.

만주에 흩어져 있는 고구려의 발자취와 흔적을 찾아가는 답사는 더위가 한층 기세를 높이는 7월말에서 8월초에 걸쳐 5박 6일 일정으로 38명이 참가하였다. 날씨처럼 밝은 표정을 지으며 반가움과 기대에 찬 모습으로 자기소개가 시작된다. 문화저널과 인연을 맺게 된 이야기며 답사에 참가하게 된 동기를 각자 특유의 목소리에 실어 웃음으로 말하고 있지만 신화처럼 전해지고 있는 고구려의 실체를 알고 싶어하는 마음은 한가지이리라.

버스를 타고 달리는 동안 차안은 고구려 벽화에 이어 백암성, 장군총에 관한 내용을 공부하는 강의실로 변하고 마음은 벌써 역사의 현장으로 달려가 있었다.

청나라의 발원지였던 심양을 떠나서 현재는 연주성이라고 불리는 백암성을 찾아 3시간 여를 달리고 또 달린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대지에 사람 키보다 훨씬 더 큰 옥수수가 자라고 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드넓은 병원에 옥수수, 옥수수... 푸른 잎이 하늘을 향해 함성을 지르고 있다. 간간이 집이 있을 뿐이다.

“어마! 이 많은 옥수수를 누가 다 심은 걸까요?” “정말 징하게 넓네.”

이런 대화를 들으며 내려꽂히는 듯한 뜨거운 햇살아래 길고 긴 잎을 가지런히 하고 조용히 줄지어 서 있는 옥수수들의 사열을 받으며 광활한 대지 위를 거침없이 달린다.

저 멀리 산이 보이고 성곽이 뚜렷이 드러난다. 낮은 지대로부터 구불구불 산 정상까지 성벽이 이어져있다. ‘연주성’ 비석이 있는 완만한 구릉에서 시작된 성벽 위를 걸어 오르니 끝없이 펼쳐진 들판과 물줄기의 흐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 더위를 씻어주는 가운데 성벽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성벽의 기단엔 조금씩 들여쌓기를 한 고구려의 독자적인 축성술의 기법이 남아 있습니다. 자, 저기를 보세요. 밖으로 나온 부분이 치입니다. 성으로 올라가는 치를 쌓은 것도 고구려인의 높은 축성술을 보여주고 있지요...”

산꼭대기에 남아 있는 망대 위에 올라 우리는 말을 잃고 숨을 죽였다. 적군이 올라오는 방향을 상상하며 회상에 잠긴다.

‘이 넓은 평원 위를 달렸을 고구려인의 모습. 당나라와 싸움에서 숨막히는 위기의 순간순간...“

동네에서 바라보면 구릉을 이루고 있는 쪽은 성벽으로 둘러치고 그 밖의 면은 가파른 낭떠러지로 그 아래 ‘태자하’라는 강물이 흐르고 있어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수성하기에 용이한 지형이다. 당나라의 침입을 받아 3개월이나 버틴 곳으로 유명한 안시성과는 달리 스스로 당나라 깃발을 내걸었다니 성축조술이 뛰어난 난공불락의 천연의 요새가 소용이 없었음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어 유난히 처절하게 느껴진다.

봉숭아꽃이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길가에서 대문은 없이 담만 쳐진 농가의 마당을 기웃대자 웃는 얼굴의 중년 여인이 보인다. 마당엔 가지며 채소가 심어져 있다. 금방 따온 토마토를 내민다. 한 입 베어 물자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 더위에 지친 갈증을 말끔히 씻어준다.

통화에서 집안으로 꼬불꼬불한 험준한 길을 2시간 여를 달리다 오녀봉의 절경과 맞닥뜨렸다. 고개를 넘자, 바람에 흔들리는 미루나무 사이로 거대한 돌계단으로 이루어진 삼각형모양의 ‘장군총’이 눈에 들어왔다. 1500여 년의 세월을 비껴 압록강을 굽어보며 힘있게 솟아 있다. 가슴 설레며 칠흑의 어둠을 뚫고 밤새워 만주벌판을 달리고, 굽이굽이 고개를 넘어 드디어 집안에 도착한 것이다.

집안! 앞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르고 뒤로는 장백산맥의 험준한 준령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천연의 요새로 400여년간 고구려의 수도로 대륙을 호령하던 동북아시아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지금은 남의 땅! 소수민족의 역사로 폄하되었지만 이 땅은 분명 중국인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했던 우리 민족의 숨결이 살아 있는 당, 우리 민족의 선영과도 같은 곳이다.

집안시를 둘러 싼 산기슭과 평야엔 ‘죽은 자의 도시’로 불리워질 정도로 수만 기의 무덤, 무덤, 무덤이 이어져 있다.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돌무지 무덤들은 왕족이나 귀족들의 무덤으로 평지에 있어 규모가 큰 편이고, 산기슭에 자리잡은 흙무지 무덤들은 평민들의 무덤으로 규모가 작은 편이다.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성산을 마주하고 이는 환도성 곁, 우산묘지 내의 농경지 한 가운데 다양한 무덤형태와 무덤의 변천과정을 알 수 있는 고분군이 자리잡고 있다. 등장인물과 생활풍속을 그린 벽화의 모양에 따라 미인총, 삼실총, 귀각총으로 불리워 지는데 관람이 허락되지 않아 안타깝게도 벽화를 실제로 볼 수 없었다. 무덤들은 가운데 부분이 함몰되어 도굴된 흔적을 전해준다. 고분 위에 개망초, 쑥 등 잡초가 자라고 있어 무심한 세월의 흐름을 알려주는가 하면 고분군 한 켠엔 옥수수가 무성히 자라고 노란 참외가 푸른 잎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지나가는 나그네를 유혹하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상징처럼 알려진 무용도, 씨름도, 수렵도는 집안 박물관에 모사그림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벽화에 남겨진 고구려인의 사상, 생활을 읽어 전달해 주려는 조법종 교수는 손가락으로 동그랗게 원을 그으며 설명을 계속한다.

“이 부분의 호랑이, 곰 그림에 주목해 주세요. 저곳에도 호랑이, 곰이 나타나 있지요. 아, 이곳의 새도 신성한 동물이지요. 민족의 뿌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단서입니다. 이 나무도 보세요.”

유일하게 관람이 허용된 5회분 4호묘로 향했다. 사진과 그림만으로 보아왔던 벽화의 실물과 마주칠 기대로 발걸음이 빨라진다. 중국인의 안내를 받아 지하로 내려가니 서늘한 바람이 온몸을 휩싼다. 온도차를 줄이기 위한 공간을 거쳐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천 수백년의 어둠을 끼치고 고구려인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다.

벽화를 마주하는 동안 ‘아!’ 하는 탄성이 흘러 나왔다. 방금 칠해 놓은 것처럼 선명한 색깔은 광채를 잃지 않고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바람에 날려 하늘을 나는 듯한 우아하고 부드러운 곡선으로 묘사된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동서남북의 방위에 따라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자리잡아 있고, 벽 위 오색 용들이 서로 얽히면서 꿈틀거리는 모습은 화려하다 못해 현란하다. 해와 달을 받쳐든 해신과 달신이 그려져 있는데, 해는 원륜 안에 세 발 까마귀가 그려져 있고 달은 원륜 안에 두꺼비가 그려져 있는데 그 윤곽이 희미하다. 주몽을 해와 달의 아들이며 하백의 외손으로 믿었던 고구려인에게 해와 달은 민족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천체라고 한다.

벽화를 부분도만 보다가 전체의 구도를 한눈에 보니 그 방법이 특이하다. 네 벽의 각 모서리에 평면석을 비스듬히 놓아 귀를 줄이면서 천장으로 좁혀나가다 마지막 천장에 커다란 판석을 놓아 만든 형태로 되어 있다. 북두칠성, 해, 달, 악기를 연주하거나 신비한 약이 담긴 사발을 든 갖가지 자세의 선선... 고구려인의 하늘세계에 들어 온 것이다. 문명을 일으킨 신들도 나타나 있다. 하늘을 날며 불꽃을 들고, 또는 곡식이삭을 오른손에 들고, 쇠를 단련하거나 수레바퀴를 만드는 모습은 시간을 뛰어넘어 고구려인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며 화려한 채색으로 표현된 우아하고 신비한 전설적인 인물들은 살아있는 듯 꿈틀거린다.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은 장구한 세월 속에서도 그 단정함을 잃지 않고 대지에 우뚝 솟아 사람의 눈길을 가장 많이 끌고 있다. 높이가 12.4미터로 위로 갈수록 들여쌓기를 하여 층 사이가 좁아지도록 한 형태인데, 1100여 개의 석재를 7단의 계단으로 반듯하게 쌓아 동방의 피라미드라 일컬어지는 장대한 무덤이다. 이 곳에 사용한 거대한 화강암은 국내성에서 23km 떨어진 채석장에서 채취된 흔적이 발견되었다. 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통구하’라는 강을 이용하여 이 곳으로 옮겨오지 않았을까 추측한다고 하니 고구려인의 건축기술을 다시 한번 입증해준다.

분홍빛 화강암으로 밝은 햇살아래 그 당당한 위용을 유감 없이 드러내고 있는 장군총은 고구려 전성기 장수왕의 영화를 상징하듯 눈부시게 밝은 광채를 발하고 있다. 사다리를 따라 올라 들어 선 현실엔 네 모 반듯한 공간으로 부부를 나란히 안치한 듯한 흔적만 남아 있으나 천장에 사용한 돌은 그 무게만도 50톤이 넘는다고 하는 설명을 들으며 좌우를 둘러보니 크기가 클 뿐만 아니라 그 장대한 스케일에 걸맞게 웅혼한 기상을 유감 없이 보여준다.

‘고구려인은 돌을 다루는 마술사’라고 한다. 한계단 한계단이 기하학적인 예술로 승화되어 엄숙하고 장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간결하면서도 강건한 인상을 주는 건물의 느낌, 알맞은 비례로 층층이 쌓아 안정감을 줄뿐만 아니라 아주 야무진 맛을 풍겨준다. 윗돌과 아랫돌 사이에 흠을 내어 어긋남을 방지하는 그랭이 기법을 사용하였는가 하면 하나의 무게가 12톤이나 나간다는 호분석을 한 면에 3개씩 놓아 돌이 밖으로 밀려나가는 것을 방지하였다 하나 세월의 풍상에는 견디지 못하고 불안정한 모습으로 어긋난 부분이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고대건축, 조각품에 우리가 압도당하는 것은 그 시대의 정신이 만들어 낸 어떤 인물과 사상에 전율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광개토대왕비로 옮긴다.

“ ‘단재 신채호’ 단원이 나오면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거대한 비 앞에 서서 감동 어린 눈빛으로 말을 건네 오는 국어교사인 장춘실 선생님. “ 이 글씨는 예서체로 예술적인 가치가 아주 뛰어납니다. 비의 크기와 성격에 걸맞은 서체로 훌륭한 작품이지요.” 글씨 하나하나에 눈을 떼지 못하고 주시하고 있는 서예가 이용엽 선생님. “ 신묘년내도해파백잔. 여기 이 부분입니다. 辛卯年來渡海破百殘... 글씨가 선 안에서 줄로 그은 듯 반듯한데 이 부분의 글씨를 보면 이상하게 조금 어긋나 있지요? 변조된 부분이라는 설이 있는데, 여기, 여기 인 듯 합니다.” 비문을 줄줄 외며 잘 보이지 않는 곳을 일일이 짚어 가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조법종 교수님. 우리의 눈길은 가리키는 손길을 따라 분주히 움직인다.

‘아 바로 이곳이구나! 일본인과 우리의 역사 해석이 다름은 바로 이 곳에서 비롯되었구나!’

실제의 비문을 앞에 두고 감격하여 찬찬히 바라보며 움직일 줄 모른다. 집안시의 유적 가운데 압권은 광개토대왕비다. 높이가 5.34m 너비 1.5m로 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거대한 바위에 고구려의 건국내력, 광개토대왕의 업적, 묘의 관리 등을 적어 놓았는데 신묘년 기사에 대하여 최근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비의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지 않고 자연스러운 형태의 면에 반듯하고 단정하게 새긴 글이 눈에 들어온다. 잃어버린 역사의 고리를 이어주는 곳! 바로 이 비문이다.

장수왕은 부왕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이 비를 세우리라 생각하고 비를 새길 바위를 고르다가 이 현무암을 발견하고는 화산지대인 백두산 근처에서 이곳까지 옮겨왔으리라. 현무암은 글씨를 새기기 쉬운 반면 마모되기도 쉬워 비바람이 들이친 부분의 글자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30여 년 동안 비문을 탁본하여 파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중국인데 의하여 글씨가 현재와 같이 더욱 알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하니 진한 아픔으로 가슴이 답답해진다.

조선족 태양소학교 운동장 담장 너머엔 호태왕의 무덤이 거대한 문으로 막혀있다. 쇠창살 문을 사이에 두고 왕릉을 바라본다. 잡초가 무성한 봉분 주변에 호분석이 거대한 모습으로 호위하고 있다. 집안시에 있는 무덤 가운데 가장 큰 규모라고 한다. 고구려 왕릉을 바라보며 매일 매일 생활하고 있는 학생들을 생각해본다. 조상의 나라 그러나 자금은 중국이 되어버린 이 땅에 와서 조국의 산천을 바라보며 조국의 말과 풍습을 배우며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 운동장엔 서너 명의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다.

호태왕 무덤의 주변엔 판자로 된 울타리, 토방이 있는 삼칸 집, 우리들이 어린 시절 흔히 보고 자라난 백일홍, 민들레, 왕관꽃, 봉숭아가 골목길과 마당 주위에 심어져 있는 집이 연이어져 있다. 길가에서 울타리 너머로 기웃거려 본다. 주인은 안 보이고 열려진 방문 사이로 TV가 보인다. 놀랍게도 한국의 대중가요가 방영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 KBS의 가요무대인 것 같다. 한국방송을 이 곳에서 보고 있다니!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어느 한적한 시골에 온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남은 나만이 아니리라. 들어가서 물 한 모금 마시며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며 앞서간 일행을 뒤따른다.

집안에서 1시간 여를 버스로 달려 강물이 합쳐지는 곳에 도착하였다. 바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시원한 강바람을 맞아 심호흡을 한다. 잡목이 우거진 가파른 언덕을 구불구불 오르니 하늘이 넓어지며 산 속에 국동대혈(國東大穴) 동굴이 나타나고 멀리로는 압록강 물이 들어온다. 어찌 보면 오히려 압록강물이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일었다.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는 해신으로 어머니 유화부인은 달신으로 비유된다. 굴속에는 주몽에게 씨앗을 전해주었다는 어머니 유화부인의 상을 중심으로 재물신과 의료신이 양옆에 나란히 모셔져 있다. 풍요로움과 다산의 상징인 물이 합쳐진 곳을 마주하는 이 동굴은 여성성을 나타낸다고 한다.

동굴에서 좌우의 경치를 조망한 후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을 따라 가니 높다란 바위틈으로 동굴이 형성되어 있었다. 바위 틈새로 흘러드는 햇빛이 신비감을 더해 주었다. 고구려인에게 이 동굴은 성지였다. 고구려인들은 이 통천동(通天洞) 앞에서 수신(隨神)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동굴이 주는 신비에서 어떤 신비로운 힘을 얻으려는 듯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같은 선조와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임을 느낄 수 있었다.

통천동은 선운사의 용문굴보다 규모가 큰 형태로 앞뒤로 하늘과 통하도록 열려 있다. 제물을 다루었음직한 커다란 바위와 제단을 바라보며 이 곳을 스치고 간 손길을 떠올리고 있으리라. 하늘에 기원하고 기원했을 소망이 신성한 장소에 참여한 우리에게 전달되었는지 유화부인의 후손임을 자청한 유상신 선생님의 맑고 투명한 목소리가 울려 펴졌다.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의 풍요로움을 이어온 고구려 심장부 제사터에서 남과 북이 하나되기를 소망한 ‘남누리 북누리’라는 제목의 노래는 듣는 이의 마음속에 청아한 울림으로 들어온다. 판소리를 연구하시는 최동현 교수의 ‘춘향가’는 우리가락에 대한 흥겨움을 일깨워주고 박남준 시인의 ‘삼기 목발놀이’라는 노래와 국동대혈 관리인인 중국인의 노래는 송가(頌歌)가 되어 높이높이 하늘로 올라가 마음은 하나로 되어가고 있었다.

고구려의 흔적과 발자취를 따라가는 동안 현재 나의 삶과 역사의 과거 사이에서 무수히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고구려는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중국에 동호되지 않은 끈질긴 생명력은 무엇인가?’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신선사상, 하늘 숭배사상은 정화수를 떠놓고 소원을 비는 할머니, 어머니들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정벌한 이민족에 대한 연맹 국가적인 포용정책에서 남북문제에 대한 해결의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숨겨진 보석’을 찾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한다면 우리는 자신감을 찾고 당당한 모습으로 21세기를 살아 갈 수 있으리라. 자기 역사의 뿌리가 자기 존재의 바탕임을 확인하는 기행이었다.


김갑순 / 문화저널 독자이기도 한 필자는 고산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번 중국기행은 명소를 둘러 봤다는 의미를 넘어 대륙을 호령하던 민족의 역사와 기개를 몸으로 느끼고 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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