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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4 | 연재 [70회 백제기행]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강따라 삶따라, 강마을 사람들의 삶
안영은 전북제일신문 기자, 문화부(2014-04-28 15:35:12)

섬. 진. 강

그 물길 5백리 길을 따라 굽이굽이‘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백제기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철이 들면서 언제부턴가 어렴풋이 동경해왔던 섬진강을 내 두 눈과 온 몸으로 느끼고 일체화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열뜨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전주를 떠나 꽃샘추위로 을씨년스러운 들녘이 눈에 보일 무렵 ‘섬진강시인’ 김용택 선생이 합류해 일행은 ‘시인의 고향’ 진메마을을 찾았다. 진메마을은 자연의 싱그러움과 사람살이의 정겨운 흔적이 담뿍 담겨있는, 어렸을 적 찾았던 시골 외가의 따스함을 간직한 곳이었다. 한여름, 물장구치며 고기잡이에 열을 올렸을 개울가, 오며가며 건너다 한번쯤은 그 개울가에 ‘풍덩’ 빠졌음직한 돌다리…. 그곳에서 자신의 성장담과 추억을 풀어내는 김용택 선생의 구수한 입담은 내가 마치 그 시절 그곳에서 해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동무들과 함께 고기잡이하는 착각을 일으켰다.

진메마을을 떠나 첫날의 숙박지인 쌍계사를 향했을 때 섬진강의 본류가 눈에 들어왔다. 나그네처럼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와 그 곁에서 강을 동무하고 있는 고운모래. 그리고 때마침 흩날리는 눈발. ‘지리산 아래 이 땅 남녘의 한과 설움, 그 긴 세월 통곡의 절정’을 안고 흐르는 섬진강의 처연함이 가슴을 아려온 것은 아직도 우리네와 질곡을 함께 하고 있는 강의 숙명 때문이었으리라.

물길을 따라 두어시간을 달린 후 도착한 숙소에서 일행간의 인사가 이뤄졌다. 백제기행이 처음인 사람, 한번도 빠지지 않고 출석부를 만든 사람, 섬진강이라는 말에 무작정 동승한 이 등 사는 모양도 가지가지, 생김새도 제각기인 것이 수많은 사연을 안고 흐르는 섬진강의 그것과 꼭 닮았다.

저녁식사 후 우리나라에서 제일이라는 화개계곡의 ‘차’를 시음할 수 있었다. 색, 향, 미가 어울려 ‘인생’을 마신다는 차. 섬진강을 볼 수 있다는 기분에 달떠 있었던 몸과 마음은 차 한 잔에 차분하게 가라앉고 이제야 강의 진면목을 맞대면할 수 있을 것 같다.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도 김용택 선생의 입담은 기행의 여흥을 한껏 돋아줬다. 섬진강은 ‘느끼고 체험하는’ 강이기에 잊혀지지 않고 살아 숨쉴 수 있다는 그의 말은 평생을 강과 함께 부대껴온 그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을까. 특히 시인과 함께 한 ‘시 낭독’시간은 백제기행에서만이 체험할 수 있는 인상 깊은 것이었다.

김용택 선생의 강연 후 옛살림 연구가 유명상 선생의 ‘차 강연’ 이 이어졌다. 모악산 자락에서 나염 등으로 전통을 지켜나가고 있는 선생은 차의 유래와 다도에 대해 깊은 지식과 이해로 기행의 또다른 의미를 부여해줬다. 쌍계사 주변의 화개계곡은 진감국사가 중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차 종자를 가져와 최초로 쌍계사 주변에 심어 이곳이 녹차의 시배지가 되었단다. 또 돌과 모래가 많은 화개계곡의 토양은 배수가 잘 되고 차나무의 뿌리가 깊게 내릴 수 있어 전국적인 차 생산지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 ‘다도’라 하며 흔히 어렵게만 생각하는 차 마시는 방법은 기본만 숙지한 후 편하고 즐겁게 마시면 그것으로 족하다니 나도 이제 부담을 떨치고 차 애호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유명상 선생의 얘기 중 가장 뇌리에 남는 것은 ‘전북의 문화’를 찾자는 주장이다. 동해로 남도로 제주도로 떠나는 여행 대신 우리가 나서 알려지지 않은 전북의 유서 깊은 문화지를 개척하자는 그의 주장은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자아의 뿌리를 발견한 것 같은 자각의 게기였으며 이번 기행의 기대 밖 수확이었다.

둘째날의 첫 기행지는 쌍계사. 샛별도 스러져 동편 하늘이 희뿌연하게 밝아오는 새벽에 찾은 쌍계사는 천년 고찰답게 그 장엄함을 뽐내고 있었다.

새벽예불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토지’의 고향 악양 평사뜰을 찾았다. ‘지리산과 섬진강이 만나 낳은 옥동자’로 표현되는 평사뜰은 형재봉과 구제봉 능선이 활처럼 휘어져 병풍을 두르고 있고 앞에는 섬진강이 유유히 흐르면서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형세를 이루고 있다.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의 무대로 잘 알려져 있는 평사리는 그러나 실제무대는 아니고 가상의 무대란다. 진주에서 학교를 다닌 박경리 선생은 1960년대 어느날 화개의 친척집을 방문하는 길에 평사리 들을 보게 됐고 ‘토지’의 무대로 평사리를 설정했다고. 그러나 아무렴 어떠한가. 내눈에는 서희와 길상이가 아직도 평사뜰을 지키며 살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 것을.

‘산 너머 남촌’ 평사뜰을 지나는 섬진강변에서 일행은 강을 바라보며 회포를 풀었다. 생전 강이라고는 보지 못했고 강물이라고는 만져보지 못한 것처럼 일행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심정으로 강으로 달려갔다. 햇볕에 반짝거리는 물결을 바라보며 ‘이 강을 배반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리라’ 하는 다짐을 했다면 비약이 너무 심한 걸까.

이 강가에 집을 짓고 살고 싶은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찾은 매실마을은 겨울 끝에 스치는 찬 기운에 아직 꽃이 피지 않은 매실나무와 매실을 담가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장독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매실명인 홍쌍리씨가 30년 이상의 매화나무에서 자란 순수한 매실만을 골라 직접 손으로 만든 매실차는 매실마을 앞을 흐르는 섬진강과 어울려 모두를 취하게 만들었다. 매실차로 인한 숙취(?)는 섬진강 재첩으로 해장할 수 있었다. 재첩은 물이 조금만 오염되면 살지 못하는 민물조개로 각종 무기질이 풍부하게 함유돼 있어 최고의 해장국으로 손꼽힌다고 한다.

재첩국 한 사발을 달게 비우고 논두렁길을 굽이굽이 찾아 헤매니 전북이 낳은 최고의 작가 최명희 선생의 ‘혼불마을’이 일행을 반겼다. 한 시대의 인간과 문화와 자연을 언어로 건져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근원적인 삶의 생명소를 모국에 바치고자 한 간절한 소망을 담아 남원시 사매면 노봉리를 배경으로 빚어진 대하예술소설 『혼불』. 그러나 노봉리의 혼불마을은 일행의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다. 몇몇 비석과 최명희 선생의 외가만이 덩그러니 남아, 그 마을사람조차 ‘혼불마을’임을 망각하는 현실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우리 민족의 피멍들이 부디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기를 바라는 그 눈물나는 해원의 굿이 열리는 마당, 빛보다 밝은 어둠의 힘을 믿으며 그 혼불이 살아있는 세상을 간절히 꿈꾸는 작가의 소망이 살아 숨쉬는 문학과 역사의 장으로 가꾸는 것은 우리의 몫일 것 인진데 말이다.

최명희 선생에 대한 마음의 짐은 마지막기행지인 마암분교에 도착해서야 희망으로 환치될 수 있었다. 운암호 둔덕에 위치한 분교는 김용택 선생이 고사리 같은 아이들과 문학의 새싹을 피우는 곳이다. 학교라고 하기에는 너무 좁은 곳이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미래와 꿈을 가꾸는 아이들의 ‘시’는 일행에게 다가오는 ‘봄’의 기운을 충만하게 했다.

이제 기행은 끝이 났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새로운 전환을 맞고 있었다. 기행 내내 일행을 편안하게 이끈 정철성 선생, 모두에게 유쾌함을 안겨주었던 우리의 ‘컬리수’ 1학년 꼬마 이사야, 일가족이 기행에 나서 나의 부러움을 샀던 4식구…. 모두모두 이번 기행을 통해 삶의 의지와 희망을 건져 올렸으리라. 그리고 섬진강! 멀리 전북 진안에서 발원해 순창, 남원, 곡성, 구례 벌판의 대지를 촉촉이 적시며 지리산으로 다가와 정답게 인사를 나누다가 다시 하동포구 80리 길을 따라 흘러 비로소 남해 바닷가에 가서야 편안한 휴식을 갖는 남도의 젖줄.

나도 이제 길을 떠나야겠다. 먼 훗날, 다시 섬진강을 찾았을 때 ‘정말 수고했다. 내 품에서 편히 쉬렴’하는 말을 들을 수 있겠지.


안영은 / 1976년 전주에서 출생했다.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전북제일신문 문화부에서 여성, 생활면을 담당하고 있다. 백제기행에는 처음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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