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8.1 | 연재 [문화저널]
[전북의 인물, 전북의 역사 ⑬] 가람 이병기
제자와 옛책을 아낀 '대쪽' 국문학자
최승범 시인 (고하문예관장)(2015-05-21 16:28:22)


 가람 이병기는 나라 기우는 19세기 말엽에 태어나, 청·장년 시절을 일제의 식민지 아래서, 그리고 말년엔 8·15 이후의 어수선한과 6·25 동란을 겪고, 60년대를 병석에 계시다가 향년 78세로 작고했다. 한생을 가람은 오직 시와 학문, 그리고 후진양성과 민족적 지절을 지키는 일로 일관했다.

 '종일 피로하여 걸음이 아니 걸린다/그래도 발은 아직 멈추 수 없다/가다가 씅러져 버리면 넋이라도 가리라'

이 시조는 가람이 전북대 문리대학장의 자리에서 정년퇴임을 하게 되는 56년 무렵에 지은 것이다. 만년에더 이만한 의지요, 결의였음을 볼 때, 가람의 청년시절의 정열이나 정진은 가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가람의 학력은 고향의 시숙에서 한문을 읽은 것과 4년간의 한성사법 졸업정도이다. 한성사법 재학 떄, 야간에는 조선어강습원에 나가 주시경의 <조선어문법>강의를 들은 것이 가람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던 듯 하다. 이후 가람은 특히 우리말과 글의 연구에 뜻을 굳혔기 때문이다. 가람의 학문은 독학에 의한 것이었다. 학문뿐 아니라 시조 창작에 있어서도 일찍이 가람은 "나의 시조선생은 옛날의 황진이다. 황징이의 시조에서 시조의 이론을 배웠고, 시조 창작의 문리를 터득하였고" 라고 말한 바 있다. 말하자면 거의 독학으로 창작도 학문도 그만큼 이룩한 것이다. 먼저 가람의 학문적인 업적을 들어보고자 한다.


고전작품 발굴 소개

 첫쨰, 국문학의 올과 날을 세우는 일에 큰 업적을 남겼다. 『국문학전사』(1957)와 『국문학개론』(1957)이 단적으로 이를 말해 준다. 다른 이에 의한 국문학사나 국문학개론의 몇몇 저서가 이보다 앞서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람의 이 두 저서는 일찍이 병욱의 지적한 바와 같이, "읽으면 읽을 수록 새맛이 나고 새로운 해석을 일깨우게 하는 신비로운 학문의 향기를 끊임없이 뿜어 주고 있다"는 것을 오늘에도 새삼 느낄 수 있다. 실로 가람은 우리의 고전을 그 당시의 누구보다도 참신한 안목으로 평가하여 작품마다 사적 개론적인 좌표를 부여하였다.

 둘째, 고전작품 발굴·소개의 업적 또한 높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출판된 단행본만도『한중록』(1939), 『인현왕후전』(1940),『역대시 조선』(1940),『의유당 일기』(1948),『근조내간선』(1949),『요로원야화기』(1949),『어우야담』(1949),『가루지기 타령』(1949),『역대조선여류문집』(1950) 등이 있다. 가람이 발굴·소개한 이러한 고전작품은 우리의 문학사에 빛과 향기를 주는 빠뜨릴 수 없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것은 그 당시 가람의 '문예과학적 안목'이 탁월했음을 말해주는 것이 된다.

 셋째, 우리 고전에 해박했던 가람은 서지학(書誌學)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일찍이 『문장』誌(1940)에 「조선어문학명저해제」를 집ㅍ필, 239종의 한글본 고전을 소개했는데, 이는 모두 가람의 수집·소장물이었다. 가람은 중국의 왕명성이 말한 "서지(書誌)는 학문의 입문"임을 강조, 국문학 연구에 있어서도 고전의 판본·활자·지질 등을 분간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역설 하였다. 그는 자신의 서지학적인 연구를 『동방학지』(연세대, 3·5집)에 「한국서지의 연구」로 발표한 바도 있다.


문학양식으로 판소리 연구

넷째, 극가(劇歌)·가가(歌佳)민요·(民謠)에서 나타난 고전시가문학에 대한 탁견이다. 오늘날은 판소리로 장착되어 활발한 연구가 시도되고 있으나, 시가문학으로서 이 분야에 처음 착안한 것은 가람이었다. 그는『국문학개론』에서, "내가 47년 서울대 문리대에서 '조선의 극가(劇歌)'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할 때 비로소 극가라는 이름을 썼고, 이것이 퍼뜨려졌다"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극가는 창·창극·판소리 등으로 불리우며 '한갖 민속예는이라는 타락된 오락적인 여흥'쯤으로 인식되던 것을 가람이 당당한 시기문학의 한 양식으로 정립시키고 그 이론적 연구에 선편을 잡았던 것이다. 가람은 가사의 기원을 조선조로 보았던 리반적 통념을 탈피, 고려말 나옹화상의 서주가로 그 기원을 주장하였다. 우리 시가문학의 모태를 민요에 두고 중시하였던 것도 그의 주장의 한 특색이었다. 또한, 『국문학개론』에서 민요·속요·동요를 총칭하여 잡가(雜歌)라 했고, 이를 성질상·창조상·형태상으로 구분지었다. 잡가·향가·시조·별곡체·가사·악장·극가 등을 취급한 총 면수 159면 중에서 잡가가 87면을 점해 그 절반을 넘는 등 그에 대한 비중과 의의를 크게 두었다. 가람은 "우리 민족·민중의 소리로서, 시가의 원천이었다. 우리 사회의 생활정태와 민족정신이 어떠하였던가를 소소히 형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다섯째, 산문문학에 대한 연구에서 본체의 구분과 양식의 세본이다. 가람은 우리 옛 산문의 문체나 중장과는 달리 4句(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시조의 실상을 바르게 파악한 것이다. 이제는 통용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시조는 '정형(定型)'아닌 '정형시(整形詩)'요 평시조·엇시조·사설시조·의 명명도 선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여덟째, 시조를 문학유산으로 뿐 아니라, 창작·보급시켜 현대에까지 이어지도록 한 것은 실로 가람의 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20년대 후반부터 선생은 시조에 대한 이론정립을 위해 많은 논문을 쓰셨다. 그 중에서도 시조의 창작면에 크게 영향을 주고, 줄곧 자양이 되어 온 논문은 「시조는 혁신하자」(1931)라 하겠다. 혁신하자는 주안점은, '실감 실정을 표현하자, 취재의 범위를 확장하자, 용어의 수삼(옛시조의 투어·한문구어 등)은 버리자, 격조의 변화(음악으로 보는 시조보다도 문학으로, 1시가로 보는)를 꾀하자, 연작을 쓰자. 쓰는 법·읽는 법을 시행의 처리·기사에도 반영하자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나라와 겨레 잊음 없어 

 가람의 창작시조는 『가람문집』(1966)의 수록분 93편이 있다. 가람의 시세계에 대한 일반적인 평은 "섬세한 언어감각에 의하여 한국적 서정주의를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육당·위당·노산의 시조에 비해 누구나 가람의 시조에서 보다 더한 질감을 바로 느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일찍이 이희승은 "'시조'하면 가람을 연상하게 되고, '가람'하하면 시조가 앞서게 된다"고 하였고. 정지용은 선생을 "시조를 사적으로 추구한 이, 이론으로 분석한 이, 비평에 기준을 세운 주석가요, 계몽·보급시킨 분이며 감성의 섬세오 신경의 예리와 관조의 총혜를 갖춘 시인"이라고 하였다. 선생에 대한 적실한 표현으로 받아들여 진다.

 끝으로 선생은 평생 일기를 쓰신 것으로도 유명하다. 『가람일지 Ⅰ·Ⅱ』(1974)가 두 책으로 간행된 바 있다. 선생의 수필 또한 언제 읽어도 독특한 묘미를 풍겨준다. 선생의 일생은 학문 연구, 시·수필, 창작, 그리고 교육으로 일관하였으나. 어느 때 상황에서도 나라와 겨레를 잊음이 없었던 분으로도 길이 기억돼야 할 것이다.


최승범 1945년 전북대학교 국문과 1회 졸업생으로 이병기 선생의 1호 제자이기도 하다. 58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여리시 오신 당신』외 다수를 발표하는 등 지역문학계를 이끌어왔으며 현재 전북대 국문과 명예교수, 고하문예관 관장으로 변함없는 활동력을 과시하고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