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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1 | 연재 [김용택 시인의 영화이야기]
전주의 극장들아 기다려라 내가 간다
-내가 본 영화들- 영화에 대한 추억3
김용택(시인)(2015-05-21 17:57:42)


 나에게 처음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분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었다. 그 분의 성함을 나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 선생님은 퍽이나 익살스러웠고 재미있었고 명랑한 분위기를 늘 풍기고 다니셨다. 눈각에는 장난기와 익살기가 실실거려 그 선생님의 얼굴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괜히 기분이 좋게 해주는 인상이었다. 우리 어머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참 낯꽃이 좋은' 사람이었다. 늘 웃고 다니셨고 공부시간에 꼭 무엇인가 입안에 넣고 오물오물하고 들어오셨는데 우리들이 "선생님 입안에 있는게 뭣이데요" 그러면 "응, 이건 코 밑에 약이다 약"하시며 입안에 것을 꺼내어 교탁 밑에 두었다가 쉬는 시간이면 다시 꺼내어 그 약을 다시 드시곤 했는데 우리들이 그 입속에 '약'이 눈깔사탕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분은 아들만 둘이었고, 소문에 의하면 어딘가는 몰라도 그 어디를 수술을 해서 다시는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참 많이 해주셨는데 이야기를 한시간 안에 끝내는 일이 없고 꼭 이야기를 하시다가 아슬아슬한 대목에서 이야기를 뚝 그치고는 "다음은 내일 헌다인"하고 우리들에게 잔뜩 기대에 부풀게 해둔 채 공부를 시작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들은 한 목소리로 "에이, 선생니임"하며 이야기를 졸랐지만 선생님은 들은 척도 안하시고 공부를 시작하시곤 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는 가을 운동장 가에 아름드리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날 선생님은 우리들을 그 노란 은행나무 아래로 부르시더니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번에 활동사진 이야기였는 데 사진이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활동사진이라고 했는데 우리들은 아무런 상상이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 영화 이름은 <검사와 여선생>이었다. 선생님은 여선생의 남편이 여선생을 과도로 찌르려다가 과일을 밟아 넘어져서 자기가 쥐고 있던 칼이 자기를 찔렀다는 대목에서 이야기를 뚝 그치고 나머지는 또 "다음시간에"였다.

 초등학교 때 맨 처음 본 영화는 공보원에서 공짜로 해주는 영화 중에 김진규가 이승만으로 나온 영화였는데, 제목은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 그 때 이승만 정권을 정당화 할 그 어떤 시대적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이승만의 일생을 보여줌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내가 어른이 된 후에 해 본 생각이었다. 김진규가 독립운동을 하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초를 겪고 감옥에 가서 온갖 고문을 받는데 손톱 밑을 송곳으로 쑤시고 거기다가 장을 지질 때 우리들은 숨을 죽이고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물고, 있는 힘을 다해 '일본놈들'을 미워했고, 어머니들은 누님들과 더불어 울음 섞인 소리를 지르며 "저런 쥑일 놈들 저런 쥑일 인사들"하며 일본놈들을 미워했고 청년들은 "야 임마 저건 영화여 영화"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아, 지금 영화 제목이 생각난다.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청년 이승만>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은 가설 극장에서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를 보았는데 온달로 나온 신영균이 나중에 훌륭한 장군이 되어 나라를 지켜내고 임금에게 큰 상을 받을 때 우린 힘찬 감격의 박수를 쳤다. 그 후에도 학교 강당이나 면사무서 창고에서 영화들을 보았지만 별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는 순창으로 학교를 갔다. 처음으로 학교에서 단체 관람한 영화는 내가 태어나 처음 본 외국영화인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었다. 아, 그 휘파람 소리를 따라 짚(지프)차를 타고 오던 죤웨인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뛰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때부터, 그 영화를 본 뒤부터 우리나라 영화를 시시하다고 무시하기 시작했다. 한국영화는 영화 같았고 외국영화는 진짜 같았다. <스팔타카스>는 내가 본 외국 영화 중에서 제일 재미있고 의미 심장한 영화였다. 커크 더그래스가 주연이었는데 커크 더그레스는 노예였다. 노예들의 해방을 다룬 이 영화는 나에게 색다른 긴장감을 주었다. <벤허>보다도 나는 이영화가 내게 깊은 인상을 준 영화로 남아 있다.

 중학교 땐가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일층에서는 남학생인 우리가, 이층에는 순창여중생들이 함께 보게 되었다. 이승복이 간장을 소주병에 얻어가지고 가다가 넘어져 간장병이 깨질 때 이층 여학생들이 어찌나 크게 고함을 지르며 울던지 우리도 눈시울을 붉히며 울었던 생각이 난다. 에이치오티가 나오면 이상한 소리를 지르는 요즘 여학생들이 그런 영화를 보면 과연 그렇게 슬프게 울까. 참 감정이 풍부하던 시절이었다. 정이 뚝뚝 넘치는 촌시러웠던 그러나 그리운 시절이다. 그 때 우리는 단체관람으로 수 많은 반공 영화를 보았는데 우리 국군은 총을 몇방을 맞아도 끝끝내 적군을 수없이 죽이고도 할 소리 다하고 숨을 거두었는데 적군들은 드드득 갈기는 총에 그저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지던 모양이 너무나 싱겁고 우수웠지만 그래도 장동휘나 김진규가 북한군으로 나온 허장강이나 인상 고약하게 생긴 적군을 물리칠 때면 일어서서 고함을 지르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그 무렵 보았던 영화 중에서 기억에 남은 영화는 장동휘 주연의 <돌아오지 않은 해병>, 신성일 엄양란 주연의 <맨발의 청춘>들이다. 특히 맨발의 청춘의 트위스트 김의 연기가 퍽 인상적이었다. 죽은 신성일을 가마니데기로 덮고 리야카에 싣고 갈 때 맨발이 가마니데기 밖으로 나온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시린 맨발을 보며 나도 인생에 그 무엇인가를 느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의 영화 보기는 오랜 휴면기를 거쳐 전주로 옮기게 된다.

 전주의 극장들아 기다려라 내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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