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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2 | 연재 [이 사람의 세상살이]
후회할 것도 없고 후회해서도 안된다
장기수 박봉현
원도연(문화저널 편집장)(2015-06-08 17:30:21)


 "50년만에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느낌이 어떠십니까?"

 "기본적으로는 누가 되든 큰 차이가 없습니다. 외국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할 숭는 없겠지요. 그러나 국내정치로는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통일문제에 있어도 그렇고 정치적으로 한 단계 올라섰다고 볼 수 있겠지요."

 "누구 찍으셨습니까?"

 " 나는 해방 이후에 한 번도 투표한 적이 없어요. 보호관찰법 때문에 사실은 투표권이 없어야 하는데 행정쪽에서 잘 모르고 투표권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 동안 내 양심상 투표하지 않았어요. 보호관찰법이 없어지면 그땐 투표해야지. 그래도 정권교체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세상은 선생님이 젊었을 때 꿈꾸었던 것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후회는 없으십니까?"

"후회는 없어요. 왜냐하면 아직도 역사는 진행중이니까. 나는 어려서부터 가난에 쫓기고 일본놈들한테 쫓기고 해방후에는 경찰에 쫓기면서 늘 쫓겨만 살아왔어요. 그래도 나는 내가 늘 약자들 편에서 생각하고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세상이 어떻게 되도 그것은 진리니까 후회할 것도 없고 후회해서도 않되고..."

 장기수 박봉현. 간첩죄.무기징역.

1960년에 그에게 씌워졌던 평생의 올무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32년후인 1991년 겨울, 크리스마스 특사로 그는 대전 교도소의 문을 나서 다시 세상속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마흔한살의 나이에 징역나이를 먹기 시작한 그가 일흔둘의 백발노인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는 세 개의 나이를 가지고 있다. 1919년 삼일운동과 함께 그는 태어났고 45년 해방과 함께 결혼을 했으며 60년 4·19와 함께 징역 나이를 먹어갔다. 32년의 징역살이는 그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그 긴긴 세월도 그를 바꾸어 놓지는 못했던 듯 하다. 그의 인생에서 그 시간들은 어쩌면 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만큼 아직도 삶에 지치지도 않았고 정정하며 맑은 눈빛을 간직하고 있다.

 고집세고 영민한 시골소년에서 가난한 일본의 유학생으로 그리고 불타는 혁명의지를 불태웠던 만학과 활동가의 시절을 거쳐, 고향에 내려와 학생들을 가르치는 좌익교사로, 다시 후퇴하는 인민군의 뒤를 따라 북한땅까지 따라갔던 사회주의자로, 평화통일의 임무를 부여받은 간첩에서 이약없는 장기수로, 그리고 '보호관찰법이 없어질때까지는 난 투표안해요'라고 말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선생은 참으로 긴장 넘치는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올해 나이 여든의 박봉현 선생은 1919년 순창에서 태어났다. 아들 오형제 중의 셋째로 태어난 그에게 가난은 일종의 숙명이었다. 열네살이 되어서야 단식을 하며 고집을 부려 보통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다시 그 고집으로 열아홉 나이에 일본 유학까지 결행했다. 그리고 그 고달픈 일본 유학생 시절은 그의 평생의 삶을 결정지웠다. 공장을 다니고 신문배달을 하면서 힘겹게 고보를 다니던 그의 학교에서 그가 4학년 되던 해 졸업을 앞둔 조선학생들을 부당한 이유로 한꺼번에 퇴학시키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다. 일본에서의 차별과 학대에 시달리면서 정의감에 불타던 그가 이 부당한 일을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었다. 그는 조선학생들을 모아 시업식날 학교를 뒤엎어 버렸다. 41년전의 일이었다.

 전쟁중이던 그 삼엄한 시절에 동맹파업을 벌였으니 그가 무사할 수 없었다. 그럭저럭 사태는 수습되었지만 그 일로 학교는 문을 닫았고 그는 대학 입학 시험마다 떨어지는 불운을 맛보아야 했다. 동맹파업을 주도한 조선학생을 받아줄 대학이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우등생이었던 그가 고보 교장의 추천을 받아 갈 수 있었던 대학이 대정대학이라는 불교학교의 사범과였다. 그러나 그때는 학도병을 모집하던 시절이었다. 이미 '머리가 제대로 박힌' 조선사람으로서 반일과 맑스-레닌주의에 흠뻑 빠져들었던 그느 징병을 피해 시모노세키로 숨어들었다.

 42년 12월까지 노동자로 숨어 살던 그는 징병기간이 끝나자 다시 현해탄을 건너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시 현해탄을 건너 한국으로 돌아왔다. 칠년만의 귀국이었지만 금의환향도 아니었고 그를 반가히 맞아줄 사람도 없었다. 여수항에서 곧바로 신의주를 거쳐 그가 찾아간 곳은 중국 단동에 살고 있던 옛 스승이었다. 그곳에서 그느 스승의 딸이었던 지금의 아내와 물 한사발 떠놓고 결혼을 했고 해방을 맞았다.

 해방을 맞고 그해 9월 잠시 고향에 내려온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연희전문 철학과에 편입에 들어갔다. 학교생활에 그다지 정을 붙이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고형곤(전 전북대 총장) 선생으로부터 칸트를 배웠고, 맑스의 자본론 강의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생활보다는 역시 조직 활동이 우선이었다. 그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남산에 가서 시위를 벌였고 47년 총파업때는 용산철도청에서 선전선동대를 맡았다. 그러나 총파업날 새벽 용산역 앞에서 암호를 주고받는 순간 형사들이 덮쳤다. 그의 첫 번째 호주머니 속에는 그날 사용할 전단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철도경찰청으로 끌려간 그는 화장실에 가서 전단을 다 버리고 이름을 속이면서 끝까지 버텼다. 그러나 후배들의 자백으로 그의 신분이 드러나고 꼼짝없는 감옥행이 될 뻔 했다. 그러나 때마침 전부터 알고 있던 철도경찰청장의 이름을 팔아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간신히 몸을 빼낸 그가 학교에 돌아왔을 때 연희전문은 그의 '인간성'을 믿고 47년 6월 졸업을 시켰고, 이제 박봉현은 학생운동가에서 활동가로 새롭게 변모해 갔다. 형사들에게 쫓기면서 이미 알려질대로 알려진 그는 서울에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고향으로 내려온 그가 처음 잡았던 직장이 순창농고. '순농'이라는 애칭으로 불려지는 이 학교는 60년대까지만해도 전북에서는 내노라 하는 명문사학이었다. 그가 이곳에 머문 일년여의 시간동안에도 그는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고, 그때 그 학교를 다니던 학생들 중에는 전북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명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짧은 고향생활은 곧 끝나고 말았다. 48년 그는 다시 쫓기는 몸이 되었다. 여·순반란사건이 터지던 날 아침 그의 제자 한명이 헐레벌떡 달려와 피신하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광주까지 걸어서 피신한 그는 다시 그곳에서 전남여중에서 임시교사로 일하다가 옛 스승이 있던 광주농고로 자리를 옮겼다. 6·25와 함께 그는 인민공화국의 광주농고 책임자로 활동을 했다. 그러나 그 생활도 잠시였다. 9월 인민군의 후퇴와 함께 그도 '일주일만에 돌아오마'는 약속만 남긴채 북으로 떠났다.

 그해 12월 무렵 평양으로 올라간 그는 그곳 교육청에서 6개월여를 근무하다가 다시 함경도 재령으로 가서 교원양성소의 교사로 일했다. 재령에서의 생활은 전쟁중인 2년여 동안 계속되었다. 53년 휴전에 즈음해서 인민공화국은 다시 그를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남한으로 가서 평화통일 사업을 하라는 것이었다. 54년 휴전 직후 얼마동안의 간첩교육을 받고 나서 그는 두 번에 걸친 시도 끝에 임진강을 건넜다.

 그러나 서울에 잠입해 들어와 보니 그는 이미 지명수배되어 있었다. 첫 번째 남파시도때 그를 안내한 요원들이 국군에 쫓기다가 그의 가방을 던져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그 가방속에 그의 신분증과 서류, 돈뭉치 등이 몽땅 들어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길가에 나서면 그를 알아 본 제자들이 달려와 인사를 건네곤 했다. 결국 서울에 더 머무를 수가 없었던 그는 장수에서 선생을 하고 있던 아내를 고창무장으로 옮기게 해서 그곳에서 같이 터를 잡았다. 무장에서 그는 전쟁전에 선생을 했었고 전쟁통에 산에 들어가서 부역을 한 일로 다시 선생을 못하고 있는 불운한 지역유지로 행세를 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이 오래 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이 오래 갈 수는 없었다. 그의 옆집에 살았던 파출소장이 4·19가 나면서 치안대 대북게로 옮겨갔고 그의 신분이 탄로난 것이었다. 얼마 안 있어서 치안대 형사들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60년 6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시절이 무척 공교로웠다. 그가 잡혀서 조사를 받고 재판을 받았던 때로 4·19혁명과 5·16쿠데타의 그 짧은 사이였다. 만약에 이승만 정권이나 군사정권에서 체포당하고 첫 재판을 받았더라면 그는 영락없는 사형감이었다. 적어도 3년 이상을 살았던 간첩은 무조건 사형시키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5·16 군사정권 이랴서 대법원의 무기징역 확정판결을 받고 그는 전주교도소로 갔다. 그의 말대로 운이 좋았던 것일까. 감옥은 끝없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72년 7·4 공동성명이 나오고 전향공작이 시작되면서 감옥은 치열한 사상공작의 싸움터가 되었다. 많은 장기수들이 쓰러져 갔다. 대전과 대구를 거쳐 82년 광주로 다시 옮겨진 그는 그곳에서 박관현의 죽음을 겪었다. 박관현의 죽음은 그에게도 새로운 충격이었다. '안간의 생명이 옳게 죽으면 저렇게 위대하구나'를 새삼 느꼈다고 했다. 감옥은 쏟아져 들어오는 학생들과의 연대투쟁으로 점점 나아지기 시작했다.

 85년 그는 다시 대전으로 옮겨졌다. 대전에 전국 최고의 형무소를 만들어놓고 전국의 사상범들을 다 모아 놓은 것이었다. 68년 그곳에 모아졌던 칠팔백명의 사상범들이 불과 이삼십명으로 줄어있었다. 거의 다 죽어 나가거나 전향해서 나간 것이었다. 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끝내 전향을 거부한 채 삼십여년 넘게 징역을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91년 노태우 정권이 장기수들을 석방하면서 세운 '70세가 넘고 30년 이상 갇혀 있었던 사람'의 기준에 들어 그는 마침내 91년 크리스마스 특사로 담 밖으로 나왔다. 32년만의 일이었다.

 91년 담밖으로 나온 그에게 세상은 오히려 감옥만 못했다. 사람들은 삭막하게 변했고 정신적으로 늘 불안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그를 사찰하는 형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기 있어서 너희들이 불편하면 나를 다시 보내줘라. 거기는 내가 제일 오래 산 곳이고 내 고향같은 곳이다. 사회가 이래서야 어디 이게 내 민족이라고 할 수 있냐. 차라리 담안이 편하겠다."

 지금도 통일사업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하겠다는 이 팔십 노객은 이 나라가 안쓰럽기만 한 것이다. 양쪽이 다 좀 더 대담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램이다. 그래서 그는 새 대통령에게 기대가 크다. "이제 양심수들 다 내놔야지요. 나는 간첩은 없다고 봅니다. 다 평화통일하는데 힘을 보태자고 내려온 사람들인데, 이제 그만 했으면 내 놓고 이쪽 저쪽을 다 잘 아는 사람들인데 써먹어야지."

 지금 그는 그가 석방되던 해에 학교를 그만둔 아내가 퇴직금으로 마련한 땅에 농사를 지으면서 소일하고 있다. 얼마 전 삼례에 있던 땅을 팔아 지금의 아파트로 옮기면서 그는 가슴이 미어지고 불안했다. 간첩이었던 내가 이렇게 잘 살아도 되는가 하는 죄스러움 때문이었다. "가족들이 고통 많이 받았어요. 지금도 받겠지, 하지만 내 앞에서 그런 말 안해요. 내가 평생 가족들한테 해준거 하나 없어요. 우리 부부 결혼한지 53년인데 같이 산 것이 십년도 안돼. 내 자식들 결혼할 때 축사 한번 못했고. 내가 나와서 자식들한테 그랬어. 내가 너희들한테 줄건 딱 한가지, 내가 건강하다는 것 뿐이다. 너희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빨갱이 자식이니까 그걸 고생이라고 여기지 말고 살아라. 그럴 수 밖에 없다."

 이 작고 단단한 팔십노객은 이렇게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을 해 보라. 나이 팔십에 자식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선생에게 남겨진 삶이 얼마일지 아직 아무도 모르나 선생이 바램처럼 통일의 서광이나마 비칠 수 있다면 그것이 그의 인생에 대한 가장 큰 보답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숙제는 지금 우리들 모두에게 남겨져 있다. "나는 평생을 쫓겨서만 살아왔어요. 그렇다고 내가 뭐 큰 간첩도 아니었고 책 한권 쓴 것도 없고 내 하고 싶은대로 살아 본 것이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내가 살고 싶은대로 살 수 없게 만든 것이 하나 있어요. 나라가 갈라져 있었고 그래서 오랫동안 갇혀 있었어요. 살아 남는 것도 어렵고 힘들었지요."

 통일은 바로 이런 마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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