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8.2 | 연재 [저널이 본다]
이 겨울의 풍경
권오표 (시인·문화저널 운영위원)(2015-06-11 14:34:23)


 가령, 이 추운 겨울에 당신이 다니던 직장이 느닷없이 부도나서 쓰러졌다 하자. 평생을 오직 직장만을 위해 온몸을 바쳐 일해왔는데 어느날 퇴직금 한 푼 없이 길거리로 나앉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아니면 좀 더 극적인 장치를 위해 한참 왕성하게 일할 사십대의 젊은 나이에 몇 푼의 퇴직금으로 정리해고 되었다고 해두자.

 물론 집에는 남편만을 하늘처럼 바라보는 아내와 한껏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이 중·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직 아내와 자식들이 이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당신은 어찌할 것인가.

 먼저 평생의 동반자인 아내에게 이 사실을 솔직하게 알려 협조와 이해를 구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우리 회사만 아니고 다른 회사는 작년에 벌써 많이 무너졌노라고. 우리 회사는 나 같은 유능한 중견사원이 있었기에 여태 버텨왔노라고. 퇴직금 몇푼도 사장임꼐서 울면서 특별히 나에게만 주셨노라고. (물론 이 부분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일이기에 약간의 수사법(?)이 필요하다) 결코, 결코 나의 무능 때문이 아닌 국가부도 사태가 물고 온 불가항력이었다고.

 그러면 아내는 당신의 손을 부여잡고 예전보다 더욱 다정한 목소리로 위로해 줄 것이리라. 난 진즉부터 알고 있었노라고. 당신이 이 집에서는 얼마나 성실한 남편이며 직장에서는 유능한 중견간부인가를. 조금도 걱정할 필요 없노라고. 머지 않아 당신의 능력을 알고 더욱 근사한 직장에서 모셔갈 거라고. 그 동안 너무 오래 직장과 가정을 위해 쉬지 않고 일했기에 잠시 휴식과 재충전의 기회를 하느님이 마련해 주신거라고. 당신과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될꺼라고. 또한 아이들은 실직한 아버지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더욱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 입시가 좀 더 쉬워진다니 학원다니는게 도리어 손해라며 강습비를 마다할 것이다. 가정과 자식들을 위해 온몸을 바친 아버지를 더욱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그럴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리고 싶은 이 겨울은 그처럼 따뜻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내 몰래 등 돌려 누운 이부자리에서 당신의 겨울은 옵시도 춥고 길 것이다. 남의 일로만 여기고 싶었던 일들이, 애써 나만은 외면하고 싶었던 일들이 이렇게 갑자기 나에게도 닥칠 줄이야. 그 동안 긴요할 때 쓰기 위해 모아 놓은 몇백만원으로 몇 달이야 가족들에게 덮어둘 수는 있을 것이다. 그 때까지 새로운 직작을 얻지 못하면 어찌한다?


 이 한파에 어느 누가 일자릴 줄 것인가. 아예 아내와 아이들에게 모든 걸 털어놔? 내년 말 적금을 찾으면 찾으면 방 세 개짜리 아파트로 옮겨 아이들 공부방부터 따로 주겠다던 아내의 표정은 어떨 것인가. 탐탁찮은 결혼에 여지껏 소원한 관계인 처가의 수군거림은?. 당장 새학기 아이들 가정환경조사서에 쓸 아빠의 직업란은 무얼로 메꾼다?.

 이 기회에 아예 팔 벗고 나서 장사를 해봐?. 고등학교 동창 누구는 퇴직금에 은행융자까지 털어 김밥 체인점 손댔다가 보증금만 몇천 날려 전세로 나앉게 되었다는데.

 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가. 누가 우리를 바람부는 길거리로 내몰았는가. 날이면 날마다 국민소득 일만 볼 시대라고 떠들 때에더, 이름도 낯선 부자클럽에 가입했노라고 거들먹거리며 해외여행 자율화를 꼬드길 때에도 제주도로 만족하며 그래도 두 눈 꼭 감고 불어나는 적금에 얼마나 행복해 했었는데.


 기상예보에서는 엘리뇨 현상으로 유난히 포근한 겨울임을 알리는데도 체감의 옷소매는 오히려 스산하기만하다. 모처럼 웅크린 창문을 열자 거기 자랑처럼 동백이 노란 꽃술을 드러내며 숭어리를 터트리고 있다. 이른 새벽, 밖은 온통 눈보라 세상인데 베란다의 화분에서는 벌써 봄이다. 그 곁에는 어느 틈에 매화도 망울망울 피어 향기를 머금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아아! 그래도 봄이 오기는 오는구나. 그래, 이렇게 찬란한 걸음으로 오는구나.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