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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4 | 연재 [전북의 인물, 전북의 역사 ]
항일과 독립 이끈 '화해의 사도'
서문교회 창설자 김인전 목사
김대전 (서문교회 장로)(2015-06-17 14:07:42)


 김인전 선생은 1910년대 전주의 뜻있는 인사들에게 존경받았다. 그가 작고한지 75년, 또 이 고장을 떠난 지 어언 78년의 세월이 흘렀고 게다가 그는 이 고장 태생이 아니었음에도 전북의 뜻있는 인사들은 그를 전북의 자랑스런 인물로 추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옛것을 숭상하는 전북의 기질과 정감있는 동화성으로 선생을 전북의 자랑으로 삼으려는 심정에서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김인전 선생은 1876년 10월 7일 풍남 서천 한산면 지촌에서 위당 김규배 선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때 수원 군수를 제수받았으나 사퇴한 감역이었던 부친은 한말 당시의 수구적인 사회풍토에서 서구의 신문화를 수용한 개화된 인물이었다. 당시 서구 문물의 도입에 촉매 구실을 한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개화운동의 선각자인 동향의 벗 월남 이상재 선생과 함께 한국 최초로 기독청년회를 세우고 경신학교에서 젊은 후진들을 직접 가르쳤다. 신문화운동에 앞장섰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김인전 선생은 일찍 개화사상에 눈을 떴고 성품이 인자하고 총명하여 여섯 살부터 한문을 사숙하고 열네살에 사서삼경을 모두 독파하고 절기의 시구와 절묘한 필법을 구사하였으며 서전기 삼백수를 스스로 풀었다. 이러한 한학실력은 당시 유림들의 찬탄을 받았다. 그는 청년기에 종교에 대한 관심이 깊어 불경과 도교의 단서를 정독하며 사상의 번민을 하는 중에 부친의 개종과 더불어 1903년 2세때 기독교 도리를 접하고 숙고한 끝에 열렬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선생은 나라가 불안하게 되어갈 때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1906년 충남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 지새울의 가택에서 중등과정의 한영학교를 세우고 월사금을 면제하고 또 침식을 제공하며 청소년들에게 민족 정신을 심어주고 신학문을 교육 시키는데 전력을 쏟았다. 이러한 과정을 마치면 이들을 다시 군산 영명학교에 전학시켰다. 1910년 새로운 깨달음으로 신학에 뜻을 두고 한영학교의 운영을 숙부인 김영배 선생에게 맡기고 그는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길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실천함으에 있음을 확신하고 평양 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학교 재학 중에는 군산 영명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고 벽촌 교회들을 순회·방문하여 전도 강설을 하기도 하였다.

 1911년 사재를 털어 서천군 화양면 완포리에 예배당을 건축하고 그 교회의 장로로 선출되어, 열성적으로 일하며 1913년에는 예수교장로회 전라노회에서 서기로 선임되고 1916년에는 전라노회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14년에는 전라노회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14년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전주 서문밖교회의 목사로 청빙되어 부임하게 되었다. 이로써 전주를 제2의 고향으로, 후손들의 삶의 터전으로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후 5년동안 교회의 목회를 보면서도 노회 성경학교의 교수와 지방 교회의 초정강설 등의 활동을 하였고, 그의 감동적인 강설은 전북 교회의 성장에 공헌을 하였다. 또한 교회 안의 청년들과 신흥·기전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경 교육을 시키면서 당시 우리 나라의 역사를 가르치고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고 독립하고자 하는 민족의 기운이 전국적으로 움트고 있었다. 선생은 자기의 주택을 개방하여 찾아오는 청년들을 규합하여 암울한 현실에 대한 자각심을 일깨우며 애족심과 신앙심을 배양시켰다. 이때 모여드는 젊은 이들 중에는 신흥과 기전 학교의 교사들과 특히 전주의 기인 '이거두리'가 식객 노릇하며 진지하게 배우고 있었다. 그는 선생이 문밖 출입을 할 때는 '쉬잇, 김목사님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를 외치며 길안내자로 자처하였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나 전국에 요원의 불길같이 일어났을 때 선생은 호남지방 기독교계 민족 운동의 중추적 임무를 담당하고 전주에서는 선문밖교회 청년들(김가전·김종곤·윤건중·최종삼·이수현 등)을 지도하여 독립 선언문과 태극기를 등쇄하고 제작·배포하게 하였다. 교계의 조직망을 통하여 전북 지방의 만세운도을 지휘하였던 것이다. 전주는 3월 13일 장날을 기하여 신흥·기전의 학생들과 예수교회 신자들이 천도교측과 합세하여 독립만세운도의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진압하던 일본 경찰들은 김인전 목사를 배후인물로 지목하고 검거에 나섰으며 선생은 재산을 급히 정리하고 여비를 마련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이후 임정의 요인으로 꿋꿋이 그 생애를 마쳤다.

 그 때 상해에서는 3·1운동의 건국이념을 달성하기 위해 먼저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을 설립하고 13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내외에 선포하였던 것이다. 이때 늦게 도착한 김인전 선생은 임시정부의 요인으로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 2월 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어 재무예산위원으로 의정원의 살림을 처리하며 인구세 징수나 독립공채 발행 등의 업무를 맡았고 4월에는 정무조사 특별위원이 되었다. 군사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선생은 장기적인 독립전쟁을 예견하였고 따라서 군사 경험자들과 군사회의를 개최되고 국민 의용병 등을 모아 군사교육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이를 외국 사관학교에 무관생도를 파견하여 수학하게 하면서 또 선전대를 마련하여 홍보의 일을 맡아 처리하였다. 이때 임정요인 중 이동녕, 이시영, 윤기섭 등은 남만주에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선생은 이와 같이 의정원에서 활발히 활동하여 1920년 4월에는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임시정부와 태평양회의 연구회에서는 국내의 활동을 분담하기로 하고 선생은 국내 각지역 기독교계에 대한 연락책임자가 되었다. 1920년 11월에는 상해의 대한이 거류민단의 본구의원으로 당선되어 상해 거주의 교민 2천여명에 대한 복지 증진을 위해 섭외활동을 하는 한편 임시정부 재무부 비서국장 겸 임시 공채 관리국장으로 임명되어 재정문제를 처리하면서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1921년에 의정원의 전북대표의원과 전라도 대표의원으로도 선출되었다. 5월에는 국무원 학무총장 대리 겸 학무차장으로 임시정부내 교육분야의 일을 전담하였다. 1922년 2월 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에 선출되었고, 3월에는 상임분과 위원회에서 내외분과위원, 재무분과위원, 교육실업분과위원 등을 삼중으로 겸임하는 등 그의 탁월한 실력은 괄목할 만 하였다.

 1921년 4월에는 입법부의 수장인 제4대 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의정활동을 실질적으로 이끌게 되었다. 국제정세에 해박한 지식과 통찰력으로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21년 3월에 독립운동 상황을 선전하면서 또한 국내 각 교회로부터 독립 자금을 기부 받기 위하여 임정안의 기독교인들은 대한 예수교 진정회를 조직하였고 임정의 독립운동 상황을 국내외에 알리는 일을 하였다. 이때에 국내의 교회를 압박하고 있는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도 해외 모든 국가들에게 알리고 진정하는 일을 하였는데 선생이 그 실무를 담당하였다. 진정서는 국제연맹·만국 장로회 연합총회·감리교 백년 기념대회·미국 각주의회 등에 보냈는데 선생이 문필에 장하므로 이 실무를 담당하게 된 것이었다. 같은 해 8월에는 대외적 외교활동을 전문적으로 담당할 기구로 태평양 회의 외교후원회를 조직하는데 선생을 역시 실무책임자로 선임하였다. 한편 외교위원회에서는 매주 발행하는 주간 <선전>의 편집 책임기자로 임명되어 선생은 많은 논설과 시 등을 게재하였고 또 다시 외교연구위원이 되어 같은 해 11월에는 의정원의원들 홍진, 박찬익, 손정도 등 25명의 의원명의로 태평양회의에 한국 독립 청원서와 한국 독립의 필요성·당위성을 역설한 40여종의 문서를 이승만·서재필의 영문 번역으로 제출하였다. 또 한편 선생은 1922년 3월 17일 안창호 등과 중한 양국민의 행복과 상호유대강화를 위하여 중한호조사를 조직하였는데 한국측에서는 김인전·김규식·윤기섭·여운형·김병조 등 15명이 대표로 참가하였고 선생을 중한호조사의 교육간사로 선출한 바 있었다. 10월에는 김구·조상섭·이유필·여운형·손정도·양기하 등과 함께 독립준비를 위한 군대양성과 전쟁 비용 마련에 힘쓰면서 일만명 이상의 노병동지를 규합하고 한국 노병회를 조직하는데 기초위원으로서 활약하였다. 이와 같이 김인전 선생은 작고하는 날까지 항일투쟁과 대한민국 독립을 위한 초석을 닦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또한 대한 적십자회의 상임위원으로 김구·김규식·이유필·이규홍·안창호 등과 더불어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일을 하였다. 선생은 망명전 전주서문밖교회 목사로 재임할 때 많은 젊은이에게 기독교신앙과 민족 정신 함양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는데 8·15 광복 후 중앙대학교를 설립한 임영신여사는 「나의 이력서」란 글에서 김인전 선생에 대한 회고를 하면서 "전주 기전여학교 재학 당시 김인전 목사를 접한 결과 그를 정신교육의 스승으로 모셨으며 신앙 지도는 물론 한국역사와 애국사상과 국제정세 등을 배우고 학생들에게 이를 전달하였는 처음으로「기도동지회」모임으로 한 것이 3·1운동 무렵에는 애국운동 결사대로 조직되어 독립만세운동에 선봉대가 되었다"고 기술하였다. 선생은 또한 전주 향교의 유림학자들과 경전 등에 관하여 담론을 할 때 모든 질문에 답함에 막힘이 없이 하였고 이에 그의 박학과 지력과 총명에 모두 경탄하여 목사를 스승으로 받들였었다. 선생은 강직한 신앙관에서 상해의 한인교회 강단에서 강설할 때는 "민족의 수난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진리로 단합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해에 따라 처신하지 말고 나라를 회복하는데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를 깨달아 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제 눈을 떠야 한다. 우리는 이제 눈을 떠야 한다. 최후의 승리를 위하여 그리스도 신앙으로 소망을 가지고 항일 정신을 견지하면서 나가야 한다"고 하였다.

 선생은 상해 임정내에서 활동할 때 각 분야에서 뛰어난 지식과 외교술로 임정의 정책 수립에 큰 기여를 하였다. 때로 임정 내부에서 의견대립과 계파간의 갈등이 심각했을 때마다 선생은 논리정연한 설득으로 무마시키고 화해하게 하였으므로 동지들은 감복하고 순응하여 그를 '화해의 사도'라고 불렀었다. 동지들이 해방 후 환국하였을 때 유족들에게 이시영·김구 선생을 비롯하여 함께 고생하였던 임정요원들은 돌아오지 못한 선생의 훌륭했던 인품을 찬양하며 애통해 하였다. 김규식 선생은 '나의 심기에 참으로 맞는 친구요 동지였다'고 말했으며 신익희 선생은 '나는 선생에게서 한학을 다시 배웠고 그 분의 학덕에 감복하였다'고 술회하였다. 또 이승만 대통령은 '신앙의 모본된 목사로서 구국의지가 참으로 강하였었다'라고 하였고, 이동녕 임정주석은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신앙과 양심에 따라 구국운동을 펼친 뛰어난 동지였다'고, 이시영 초대 부통령은 '보기 드문 고결하고 단아한 인품의 소유자였다'고 말하였으며, 안창호 선생은 '파벌과 계파를 초월한 참신한 신앙인'이라고, 박은식 선생은 '의장원 의장으로 독립 투쟁의 적극성과 인자함, 책임완수 의식이 투철한 분'이었다고, 노백린 선생은 '입법부와행정부를 조화하고 단결하게 하는 명수였다'고 술회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노심초사해 온 선생은 1923년 5월 3일 상해의 한 여관에서 동지들과 국가의 장래사를 논의하는 도중 피로에 지쳐 심신에 분혈되어 자리에 눕게 되었고 5월 12일 오전 1시 30분에 상해 동인병원에서 48세의 일기로 서거하셨다. 이역 외인묘지에 오랫동안 묻혀있던 유해는 다행히도 1993년 8월 국가의 배려로 환국하여 국립묘지 임정요인묘역에 안장하게 되어 그리스도 재림의 날 만을 기다리게 된 것을 유족의 한 사람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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