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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 | 연재 [촌스런 이야기]
건강과 생활을 살린 그리고 농사의 소중함
임실-귀농으로 남편 건강 되찾은 이명숙 씨
(2015-11-16 15:53:35)

 

 

임실군 신덕면 삼길리, 내비게이션에는 나오지 않는 농로를 따라 산으로 올라가다보면 길의 끝에 마을 꼭대기집이 나온다. 바로 이명숙(60) 씨 부부의 보금자리다. 산비탈에 자리 잡은 집과 블루베리 농장에는 가을햇볕이 막힘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사람은 살리고 봐야지" 무작정 귀농
이명숙 씨와 남편 주능국(70)씨 부부는 경기도 이천에서 장성한 아들 부부와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오래전 사별한 그는 1994년 주능국 씨와 재혼했다. 남편과 아이들은 혈연이 없음에도 누구 못지않게 각별했다. 이명숙 씨는 활달한 성격으로 장애인 합창단 활동에 참여해 표창을 받기도 했다. 화목한 가족, 보람 있는 생활, 대단할 게 없다 해도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이었다.
시련은 예고 없이 다가왔다. 2009년, 빨래를 하다 남편의 하혈을 발견한 그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불과 얼마 전에 있었던 건강검진에서 큰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병원에서 몇 달 만에 다시 받은 검진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직장암. 그것도 4기에 이를 정도로 진행된 상태에 간으로의 전이도 발견됐다. 몇 달 만에 다른 말을 하는 병원이 원망스러웠지만 그곳에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청주로, 원주로 잘한다는 병원을 찾아다녔다. 절망적인 진단이 이어지는 중에 수술을 해보자는 의견을 내놓은 의료진이 있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경과는 나쁘지 않았지만 이후가 문제였다.
이명숙 씨는 남편이 오랫동안 운전해온 화물차를 몰래 팔았다. 이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병원에서 함께 투병하던 환자들의 말이 떠올랐다. "산에 살아야 한다. 소나무 냄새를 맡고 살아야 회복이 된다더라." 오라버니가 살고 있는 전주 인근에서 땅을 알아보다 생활정보지를 통해 지금의 보금자리를 구했다. 여러 후보지를 놓고 저울질할 겨를도 없었다. 남편과 함께 땅을 보고 산세와 환경만 본 채로 바로 이주를 결정했다.
"한 번도 시골살이를 생각해 본적이 없었어요. 어릴 적에 농촌에 살긴 했지만 기억도 까마득할 정도고요. 다만 아저씨를 살리려면 한시라도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결정했어요. 집에 있는 살림살이도 그대로 두고 몸만 내려올 정도였으니까요."
집도 밭도 없던 산에 몸을 기댈만한 작은 집 한 채를 만든 후 바로 이주했다. 2010년의 일이었다. "아저씨 간호하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죠. 여기서 나아서 갈지 묻고 갈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실낱같은 희망이었지만 부부는 기어코 그 바늘구멍을 헤쳐 나왔다. 지난 2014년 남편 주능국 씨는 더 이상 통원치료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간으로 전이됐다던 종양도 더 이상 커지지 않아 지켜보기만 하기로 했다.
"지금은 저보다 더 건강해요. 오히려 제가 무릎을 다쳐서 요즘 병원을 다니고 있어요."

 

뼈아픈 시행착오의 연속
남편의 건강을 위해 무작정 시작한 귀농살이. 그러나 낯선 땅에서의 삶이 쉬울 리 없었다. 경험도 없었고, 조언을 청할 선배도 없었다. 남편의 병세가 나아지던 2012년, 귀농 2년차에 접어들자 생계를 위한 활동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전주의 오빠가 하던 오리사육을 함께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 다음 선택은 산닭이었다. 그러나 수지가 안 맞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잘 키워 팔아도 산짐승들이 잡아먹는 손해를 생각하면 마땅치 않은 사업이었다.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마을 사람들과의 어울리는 것이었다. 난데없이 터를 잡은 외지인들을 향한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매섭기만 했다. 먼저 찾아가 가까워지려해도 '뭐 얻어먹을 게 있나 싶어서 그런다'는 차가운 반응이 돌아올 뿐이었다. 이미 인근 일부 귀농인과의 갈등으로 마을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 지 오래였다. 마을 돌아가는 소식에서 소외된 것은 물론 노하우를 전수받기도 어려웠다. 원래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다닐 정도로 활달했던 이명숙 씨에게 이런 환경은 더 큰 괴로움이었다. 마음의 병을 얻어 치료를 받을 정도였다. 결국 땅을 팔기 위해 내놓기에 이르렀다.
"이렇게까지 되니까 억울한 마음도 있고 오기도 생겼어요. 그래서 어차피 땅 내놨으니 이장님을 찾아가서 술 한 잔 하면서 얘기 한 번 합시다 했죠." 솔직하게 서러움과 어려움을 털어 놓으니 두텁던 마음의 벽이 조금은 허물어졌다. "이장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오해가 있었다. 이렇게 됐으니 마을 사람들과 함께 다시 잘 해보자." 이명숙 씨의 노력은 계속됐다. 부부가 함께 동네 교회를 다니며 마을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활달한 그의 성격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어르신들과 눈높이를 맞추어 이야기하고 살뜰히 챙겨드렸다. "이제는 그래도 마을에서 '열심히 살려는 사람, 어른 공경할 줄 아는 사람'이란 말을 듣고 살아요." 생활개선회, 블루베리작목반, 주민센터의 난타 교실, 신덕면 귀농귀촌인협의회 회장까지, 적응기를 마친 이명숙씨는 지역사회 구석구석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귀농인들을 보는 시선이 여전히 차가운 게 사실이에요. 그 시선을 만든 책임이 일부 귀농인들에게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걸 돌려놓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어요. 또 귀농인 뿐 아니라 귀농인을 맞는 마을 사람들에게도 교육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화학'없이 키운 블루베리
산닭의 실패를 겪은 후 이명숙 씨는 좀 더 신중해졌다. 뒤늦게나마 귀농교육과 영농교육을 받으며 새로운 작물을 물색했다. 그때 주위에서 추천한 것이 바로 블루베리였다. 물만 잘 주면 탈 없이 자랄 정도로 환경에도 잘 맞았고, 수익도 괜찮은 작물이었다. 무엇보다 남편 주능국 씨의 특기를 살릴 수 있는 작물이었다. 주능국 씨는 40년 전 일본인에게 원예를 배웠지만 화물차 운전기사로 전업하면서 수십년 간 그 기술을 써먹을 일이 없었다. 원예작물을 가꾸면서 다시 그 기술을 되살릴 수 있게 된 남편은 건강과 함께 활력을 되찾았다.
부부는 지난 2010년 귀농한 이래 '화학'이 들어간 제품을 써본 일이 없다. 건강을 위한 귀농이었던 만큼 그 부분은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농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유기농비료와 친환경 농약만으로 건강하게 블루베리를 키우고 있다. 처음 50주로 시작해 3년차를 맞은 올해는 1000주의 블루베리에서 600kg의 수확을 얻었다. 본격적으로 수확이 나올 수령인 내년부터는 1t가량의 수확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 집 블루베리는 당도가 높은 게 자랑이에요. 또 가지치기를 통해 열매가 최대한 크게 맺히도록 하는 것도 남들과 조금 다른 점이죠. 둘이서 수확하기 편하도록 숫자를 줄이는 것도 있고, 큰 열매가 더 달고 높은 값을 받거든요."
내년 이후의 수확을 위해 부부는 새로운 품종을 들여와 여러 가지 실험도 해보고 있다. 남편의 원예기술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더 많은 수확, 더 큰 수익에 대한 욕심보다 함께 밭으로 나가 함께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이 생활이 행복하다. 어쩌면 오지 않았을 수도 있는 오늘의 소중함을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귀촌을 꿈꾸는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
"할 말을 해야 할 땐 꼭 해야 한다"
준비 없이 급하게 귀농을 하게 되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오랫동안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온 마을 사람들과 동화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다가가야하고 좀 억울해도 참아야할 때도 많다. 하지만 꼭 해야 하는 말이 있다면 목소리를 내야한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면 내게 필요한 것에 대해 솔직하게 얘기하고, 정당한 권리라면 나서서 찾아야 한다. 주위에서 챙겨주기만 기다리다가는 오히려 쉽게 지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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