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5.12 | 연재 [읽고 싶은 이 책]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이광재의 『나라없는 나라』
곽경상(2015-12-15 09:59:35)

 

 

 

조선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은 조선을 '백성의 나라'라고 했다. 고려 귀족사회가 문벌과 권문에 기댄 세력이 지배하는 사회였다면, 새로운 왕조 조선은 백성이 근본이 되는 평등한 사회라는 것이었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확립된 조선 초 경국대전체제가 의제와 사상을 비롯해, 통치구조와 신분제에 이르기까지 백성을 근본으로 삼음에 따라 그 가치는 구현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경험했던 백성의 삶은 기둥도 아니었고, 서까래도 아니었다. 백성의 삶은 훨씬 더 고단했고, 그들에게 부여된 짐은 무거웠다. 왜군이 쳐들어오자 국왕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을 간 반면, 백성들은 자신들의 가족과 마을 공동체 그리고 국가를 구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국왕과 양반 지배층들이 실추된 권위와 지배체제를 바로잡겠다고 나서면서, 조선은 훨씬 더 경직된 사회구조로 전환되었다. 주자주의를 토대로 한 노론의 일당 독재는 폐쇄적 신분질서와 관료의 부정을 제도화했다. 특히 공동납을 통해 부과된 백성의 세금은 그 무게를 견디기 힘들만큼 가혹했는데, 무덤 속의 사람과 배 속의 아이에게까지 부과된 군역과 모래와 겨를 넣은 환곡의 부정은 조선사회를 뿌리 채 흔들면서 파괴시켰다. 그러한 현실적 토양 속에서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자라난 것이다.

 

백성없는 나라, 나라없는 백성

백성의 나라를 표방했지만, 정작 양반의 나라가 되어버린 조선을 개혁하겠다고 나선 인물이 전봉준이었다. 녹두장군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의 일화는 오랜 기간 역사는 물론, 다양한 장르의 문학을 통해 새롭게 조명되어 왔다. 특히 민주화 과정에서 민중사회의 이상적 모델로 조명되면서 동학과 전봉준, 갑오농민전쟁의 혁명성은 크게 부각되었다. 하지만 민중주의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전봉준을 비범하고 영웅적이며 변혁적인 인물로만 해석할 뿐, 평번한 인간으로서의 면모는 사장시켰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전봉준은 단지 혁명가로만 읽혀지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은 전봉준을 신화화하거나, 농민전쟁을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지 않다. 필부 전봉준과 그의 친구들 김덕명, 김기범, 손화중, 을개, 갑례 등 전장 속의 평범한 민중들의 일상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소소하게 그리고 있다. 그들은 영웅적인 인물들이 아니다. 단지 백성의 나라에서, 백성이 핍박받는 것을 참지 못해 일어선 의인이었다. 말목장터를 출발해 시작된 이들의 전쟁은 전라도를 점령하며 일시적인 승리를 거뒀지만,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소설은 그러한 전쟁의 참혹한 과정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전쟁의 실패로 도망을 다니는 전봉준의 모습은 평범한 한 인간의 고뇌와 슬픔이 엿보인다.
19세기 말 근대화를 향한 노선 투쟁, 그 속에서 전봉준의 자주적 근대화노선이 대원군과 뜻을 함께 했지만, 노론․개화파가 주도한 일본식 근대화노선에 패배함에 따라 결국 조선의 백성은 "나라없는 나라"인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봉준의 나라', '대원군의 나라', '김옥균의 나라'

소설 속에 그려진 바와 같이, 실제 역사에서 전봉준과 을개가 꿈꾼던 세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갑오농민전쟁은 패배했고, 전봉준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지만 전봉준이 꿈꾸었던 인간 해방과 평등주의의 가치는 후대의 역사 속에 면면히 이어졌다. 갑오개혁을 통해 봉건적 신분제는 폐지되었다. 과부를 포함한 여성의 사회적 차별 역시 시정되었다. 무엇보다 봉건적 군주제에 대한 개혁과 민권을 앞세운 시민사회의 토대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공화제에 대한 논의의 장이 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방식과 방향을 둘러싸고 세력 간의 입장차는 분명했다. 군주권과 민권을 둘러싼 갈등이 토지문제로 연결되면서 그 대립의 양상은 심화되어 갔다. 중세사회를 지탱시켰던 지주-소작체제에 대한 개혁이기도 했던 토지문제는 체제개혁이자, 근대국가의 성격을 규정짓는 심대한 문제였다. 이를 두고 '김옥균의 나라'는 지배자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지주적 길'을 선택했다면, '전봉준의 나라'는 경자유전의 혁명적 토지개혁을 실현하는 '농민적 길'을 주장했다. 이러한 서로 다른 시각은 일제시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건설운동으로 연결되어 현대 한국사회의 남북한 분단을 가져왔다. 그러한 갈등의 틈바구니 속에서 '대원군의 나라'는 '척사위정'을 주장하며 봉건왕조를 옹호하는 반동성을 보였다.
이처럼 소설 속에 전봉준과 대원군은 자주적 근대화라는 발전의 가치를 공유한 동지적 관계로 나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에 불과한 것일 뿐 실제 역사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동학의 일부 세력이 대원군과 접촉을 하지만 그것은 전봉준의 실제 노선과는 다른 것이다. 아마도 다양한 동학 내부의 흐름을 보수적으로 해석한 연구를 참조한 결과 때문으로 보이는 데,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이러한 해석은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더불어 해월 최시형을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이는 김덕명과 전봉준이 소설 속에서 그려질 때, 지나치게 평범한 인간적인 관계만이 부각될 뿐, 그들의 역사적 비전과 사상은 명확히 드러내 보이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글을 읽는 내내 내용의 전체적인 맥락을 잡는데 어려움이 있다. 역사적 사건을 개인 간의 관계 속에서 풀어내려고 하다 보니 내용이 지나치게 산만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다양한 역사적 인물을 발굴해 구한말 민중사를 소설로 담아낸 "나라없는 나라"는 현실의 고통에 좌절하지 않고, 더 좋은 내일을 만들어 갔던 민중의 진면목을 말하고 있어, '혼돈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커다란 자극제가 된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