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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3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불현듯 찾아온 사랑을 지켜낼 수 있는 용기
<캐롤>
김경태(2016-03-15 11:28:31)





1950년대 미국 뉴욕, 가정주부 '캐롤'은 뒤늦게 동성을 향한 특별한 감정을 깨닫고 남편 '하지'와 이혼을 한 상태이다. 그녀는 딸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들른 백화점에서 점원인 '테레즈'를 만나 미묘한 눈길을 주고받는다. 장갑을 찾아 준 것을 핑계로 캐롤이 테레즈에게 식사 대접을 하면서 그들은 가까워지고 급기야 단 둘이 크리스마스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캐롤에게는 아내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가 언제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며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하지가 있고, 테레즈에게는 자신과 함께 떠날 유럽 여행에 들떠있는 애인 '리처드'가 있다.

캐롤을 향한 감정에 혼란스러워 하는 테레즈는 리처드에게 남자와 사랑에 빠져 본 적 있냐고 묻는다. 그는 그런 경험은 없지만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들어봤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두 남자가 불현듯 사랑에 빠지는 것, 즉 그런 사건에 대해서 묻는 거라고 말한다. 그녀가 궁금한 건, 동성애자라는 성 정체성이 아니라 동성 간의 사랑이다. 리처드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숙고에 앞서 남녀 각자의 통념적 역할 놀이에 근거한 연애에 집중한다. 그는 테레즈의 감정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아니라 남자로서의 자아도취적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사진 촬영에 대한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캐롤을 모델로 한 사진에 담긴 애정 어린 시선을 알아본 '대니'만이 유일하게 그녀를 이해하는 남자로 등장한다.

하지 역시 자기중심적인 결혼 생활로 캐롤을 지치게 했다. 끝내 그는 캐롤의 남다른 모성애를 이용해 그녀의 마음을 돌려놓으려는 그릇된 선택까지 해버린다. 애초에 공동 양육을 전제로 이혼했지만, '윤리 조항'을 들먹이며 그녀로부터 딸을 볼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하려고 한다. 심지어 테레즈와 떠난 여행에 탐정을 붙여 둘의 관계를 법정에서 폭로하고자 한다. 그녀는 딸과 테레즈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기로에 선다. 결국 그녀는 딸을 되찾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테레즈에게 이별을 고하는 편지를 쓴다.

테레즈는 캐롤의 여행 제안에 대한 섣부른 승낙 때문에 캐롤이 더 이상 딸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자책을 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이든지 거절하지 않고 좋다고 말하기 때문에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 건지 알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지금의 이 사랑조차도 자신의 우유부단한 태도 때문에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견고한 세계를 무너뜨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가능하다. 또한 상대방의 모든 제안에 '네'라고 긍정할 수 있는 것은 기꺼이 상대방의 세계에 뛰어들어 현재의 자신을 부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마음가짐의 방증이다. 그가 남자를 그랬듯이 여자와 사랑에 빠질 수 있었던 것, 아니 남녀 구분을 떠나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누군가를 만나 사랑할 수 있었던 것도, 그 거절 할 수 없는 태도 때문이다.

차 안에서 몇 달 만에 우연히 테레즈를 목격한 캐롤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기로 결심한다. 윤리 조항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욕망을 억누르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딸에게 결코 옳지 않다는 판단에서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딸의 양육권을 포기하겠으니 대신 딸을 만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를 승인해 달라는 최후 제안을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한다. 그것이야말로 서로가 더 이상 추해지지 않고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윤리 조항이 간과한 진정으로 윤리적인 삶이란, 사회적 규범과 자기 욕망의 지난한 타협에 기반해 자기 자신을 용기 있기 배려하는 것이다. 캐롤은 테레즈와 다시 만난 자리에서 자신과 함께 살자는 제안을 하며,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다. 이제 테레즈의 용감한 결단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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