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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4 | 연재 [읽고 싶은 이 책]
세상과 더 많이 불화해야 한다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
채민(2016-04-15 11:02:56)




'흙수저, 금수저'라는 말로 표상되는 이른바 수저계급론이 많이 회자되고 있다. 노력보다 태아나 살아가는 계층이 더 우선이라는 이른바 수저계급론이 그만큼 사람들에게 공감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젊은 세대가 패기와 노력이 부족한 것은 탓하지 않고 부모 세대 탓이나 하고 있다고 힐난한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개인의 노력만으론 소박한 행복조차 부던한 노력으로도 어려운 일임은 부정할 수 없다. 수년전부터 불평등과 차별, 빈곤과 관련된 수많은 자료들이 거울처럼 이 사회를 비추고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말이다. 수저계급론에 못지않게 현재 한국을 풍자하며 자주 사용되는 말이 '헬조선'이라는 단어다. 나는 헬조선이라는 어감만큼이나 이 말이 생기게 된 배경 때문에 그리 좋아 하지 않는다. 애초에 모 인터넷커뮤니티에서 식민사관을 비호하고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긍정하는 사람들이 한국을 비하하기 위해 헬조선이란 말이 나오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수저계급론과 함께 인터넷 공간을 넘어서까지 헬조선이 사용되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절망에 가깝다는 우울한 반증이라고 느낀다.
수저계급론, 헬조선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이러한 말들은 현재 한국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리고 『한국이 싫어서』도 신조어들처럼 우리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의 한 부분이다. 앞서 소개한 말들을 조합해본다면 이 소설은 흙수저 여성의 헬조선 탈출기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무턱대고 욕하진 말아 줘." 1인칭 화자이자 주인공인 계나는 한국을 떠나 호주로 가게 된 일들을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것처럼 말한다. 20대에 금융회사에 들어갔지만 출근부터 퇴근까지 숨 막히게 돌아가는 일상이 거의 전부였다. 그녀는 매일 울며 회사를 다녀야했고 더 나아질 것 없이 딱 그 정도로 일하다 추락할 듯한 '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이민을 추진한다.
그렇다고 호주에 무사착륙 하냐면 그렇지만도 아니다. 소설 속 표현을 빌리자면 계나에겐 호주도 비행기 낙하보다 위험성이 높은 빌딩에서 낙하산을 메고 떨어지는 이른바 '베이스 점프'하는 곳이었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한국보다 호주가 조금 더 위안이기는 하다. 그렇게 호주 정착을 위한 준비를 하던 중 계나는 잠시 한국으로 돌아와 고민한다. 그런대로 안정된 환경과 결혼이란 선택지가 하나 더 늘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이번에는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행복해지기 위해서 한국을 떠난다.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수는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이 소설은 담담한 불편함이다. 그런데 참 쉽게 읽힌다. 왜 그럴까 생각하다가 문득 르포르타주 문학이 생각났다. 소설적인 장치를 제외한다면 이 이야기는 여성이 한국에서 어떻게 노동자로 살았고 왜 한국을 떠나게 됐는지를 풀어낸 르포 작품 같다. 불편하지만 낯설지 않은 또 다른 나 혹은 우리의 이야기이니 담담하게 흡수된다. 이 속에서 계나의 한국에 대한 감정,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유달라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이 유달리 까칠해서도, 개인의 노력이 부족해서도 아님을 소설은 말한다. 약대에 진학한 계나의 친구에게 "약사는 전망 괜찮아?"라고 질문하자 그 친구의 답변은 이랬다. "약사도 뭐 어느 날 갑자기 슈퍼마켓에서 어지간한 약 다 팔게 되면 망하겠지. 그런데 그런 날은 안와." 그이는 편의점에서 상비약을 살 수 있는 날이 올지는 몰랐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날'을 단정 지을 수 없기에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줄 안전망이 필요하건만 한국의 사회안전망은 위태롭기까지 하다. 더구나 더 낮은 계층일수록 사회안전망은 있으나 마나기에 노동과 일이 안정되어야 하지만 그마저도 뺏기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낙하산을 메고 떨어지는 걸로 표현한 계나의 말은 슬프지만 통렬하다. "높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바닥에 닿기 전에 몸을 추스르고 자세를 잡을 시간이 있거든. 그런데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그럴 여유가 없어. (중략) 낮은 데서 사는 사람은 더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조심해야 해. 낮은 데서 추락하는 게 더 위험해." 여기에 여성과 소수자의 정체성이 차별과 혐오가 되는 한국사회의 고단함을 한 줄로 정리한 말속엔 단단한 가시가 느껴진다. "어차피 난 여기서도 2등 시민이야. 강남 출신이고 집도 잘 살고 남자인 너는 결코 이해 못해."
책장을 덮으며 문득 계나의 한국이 싫어서라는 말이 세상과 불화하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져 좋았다. 인권단체에서 일하다 보면 간혹 몇몇 사람들이 인권은 밝고 좋은 것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는 한다. 하지만 인권은 세상과의 불화고, 불협화음이었다. 인권은 부조리에 저항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눈물을 밑거름으로 탄생했고 세상과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확장해왔다. 계나가 사자의 먹잇감 같은 초식동물로 살지 않겠다는 것 역시 세상에 맞선 정당한 불화라고 생각한다. 다만 떠나지 못하는 우리들은 개인의 불화에서 한걸음 더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이의 말대로 "근본적인 해결책은 힘이 들고, 실행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니" 때론 턱없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시키는 대로 하다가 새끼 낳아 길러서 머리수만 채우면 되는 가축이요.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거요. 살아있는 인간은 빼앗으면 화내고 맞으면 맞서서 싸웁니다." 웹툰 <송곳>의 구고신 소장은 일갈은 도망칠 수 없는 또 다른 '계나'들인 나 그리고 우리에게 다른 생존본능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 어떤 선택이든 세상과 우리는 더 많이 불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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