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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5 | 문화현장 [산민 한승헌 변호사 ]
시대의 불의와 맞서 싸운 참 스승, 잊지 않겠습니다.
김하람 기자(2022-05-10 09:57:51)


마지막 떠난 산민 한승헌 변호사 

시대의 불의와 맞서 싸운 스승, 잊지 않겠습니다.


 김하람 기자

군사독재정권 시절 강력한 국가 권력 아래에서 탄압받고 희생당한 시국사범 변호에 힘쓴시국사건 1 변호사한승헌 변호사가 지난 4 20 별세했다. 향년 88. 


1934 전북 진안에서 태어난 그는 전주고, 전북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언론인을 꿈꾸기도 했지만 한국 전쟁 직후 혼란스러운 언론계를 보며 법조계로 길을 돌렸다. 1957 8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1960 검사로 입직, 5년간 역임하다 1965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시국사건 변론에 뛰어들게 것은 1965 남정현 작가의 소설 <분지> 필화 사건 이후부터다. 그는 소설이 북한 노동당 기관지에 게재되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작가를 변호했다. 사건을 계기로 그는 동백림 사건(1967), 통일혁명당사건(1968), 김지하 <오적> 필화 사건(1970), 울릉도 간첩단 사건(1974), 민청학련 사건(1974), 인혁당 재건위 사건(1974),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1980),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2004) 100건이 넘는 시국사건 변호를 도맡았다.


그는 인터뷰에서 대통령 긴급조치 4 위반으로 문제 삼은 민청학련 사건과 배후 조종의 누명으로 사형까지 당한 인혁당 사건을 잊을 없다고 말했다. 악질적인 날조로 처형까지 이른 사법 범죄이며 사법 살인이었기 때문이다.


시국사건 변론에 있어 당국으로부터 여러 방해와 감시를 받았다. 자신이 피고인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변호사 자격이 일정 기간 상실되어 생계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75유럽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당한 김규남 의원의 죽음을 애도하는 어떤 조사(弔辭)’ <여성동아> 기고했다가 반공법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구속, 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8년여간 변호사 자격이 박탈당했다. 1980 김대중 대통령의 내란음모 사건 당시 공범으로 몰려 투옥되기도 했다. 사건 모두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전무이사, 민주회복국민회의 중앙위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등의 직분을 맡아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1986 홍성우·조영래 변호사 등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전신인 '정의 실현 법조인회'(정법회) 결성했다. 이후 김대중 정부 감사원장을 지낸 노무현 정부 때는 사법제도 개혁추진위원장을 맡았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대리인단을 이끌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였던 시절에는 선거 캠프 통합정부 자문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밖에도 방송위원회 위원, 언론중재위원회 위원,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 위원, 헌법재판소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일본 북해도 대학 문학부 표본고에서 발견된 무명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 봉환에 힘썼다. 사단법인 마당과도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사단법인 마당의 고문을 맡아 고향 후배들의 문화운동을 격려하고 지원해왔던 그는 자신의 전문 영역인 저작권 강의와 문학인 이야기, 삶의 지혜 등을 주제로 강연으로 후배들과 만났다. 


민중화와 인권운동에 앞선 그는 인권변호사라고도 불렸으나 호칭이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변호사의 사명이 기본적 인권 옹호와 사회정의 실현에 있으니 굳이 인권을 강조하는 것은 어법에도 맞지 않는다 이유에서였다.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는 유머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삭막하고 답답한 상황 속에서 유머를 통해 여유를 찾았다. 유머 칼럼을 묶어 출간한 <산민객담>에서 그의 유머와 해학적인 면면을 만날 있다. 그는 <산민객담> 포함 일평생 40 권의 책을 발간했다.


그의 산민 근재산민(近在山民), 민중들과 가까이 있을지어다라는 의미다. 그의 호처럼 소외받는 사람을 위해 헌신하고 만인의 스승으로서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가르쳤다. 가르침을 마음에 새긴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빈소를 찾았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일인 25일에는 그가 사랑하던 모교 전북대에서 노제가 진행됐다. 이날 노제에서 김승수 전주시장은 추도사를 통해부정과 반인권 앞에서는 서슬 퍼런 단호함으로 투쟁했고 민주와 인권의 가치에 인생을 바치셨다아름다운 시인이었고 가슴 뜨거운 인권변호사였으며 우리 모두의 스승이었던 선생님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황민주 시민사회단체 대표의 추모사와 김용택 시인의 추모시, 왕기석 명창의 추모곡도 이어진 노제를 마친 추모객들은 광주 묘역으로 떠나는 운구 차량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그는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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