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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 | 문화현장 [아버지의 해방일지 작가 정지아]
아버지의 유산을 소설에 담기까지
신동하(2023-01-15 01:49:42)

'아버지의 해방일지' 작가 정지아

아버지의 유산을 소설에 담기까지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장례식 풍경을 담은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치적 색깔의 특수성보다 ‘아버지’라는 보편성을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담아내어 출간 직후부터 지금까지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 12월 8일 전주의 베스트웨스턴플러스호텔에서는 소설을 쓴 정지아 작가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정지아 작가는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정 작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2008년의 노동절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장례식장을 찾은 것은 아버지와 뜻을 함께했던 동료들이었다. 대부분 조국의 통일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이들로 사회주의 사상의 마지막을 함께하며 40여년간 복역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다음은 아버지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는 군인으로 일하다가 학교에서 교련 선생을 오래 한 뼛속까지 ‘우파’였다. 둘은 매일 새벽 신문 보급소 앞에서 아웅다웅 다투던 사이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고 그는 8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장을 하루에 30번을 넘게 찾아왔다. 그 이후에는 연좌제가 있던 시절 아버지 때문에 공무원이 되지 못한 작은 아버지가 찾아왔고,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소녀가 담배 친구였다며 빈소를 방문했다. 정 작가는 그런 오합지졸을 보며, '이 장면을 소설로 쓴다면 어떻게 구성해야 할까' 고민했다고. 정 작가는 자식을 글쟁이로 키우지 말라고 농담하며 이렇게 말했다.


"하나 있는 딸자식은 장례가 처음인지라 얼떨떨해서 장례식장 사장님도 걱정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길 때마다 누구인가가 계속해서 나타나서 전부 도와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시냐 물어보면 아버지가 구해준 어떤 분의 자식이라고 그래요. 한편으로 어떤 사람은 화환을 지팡이로 내리치며 빨갱이가 죽었는데 화환이 웬 말이냐며 침을 뱉기도 하는데, 그 장면이 너무 기묘했어요.“


지금이야 평생 머물고 싶은 따스한 곳이지만, 어릴 적 정 작가는 구례를 좋아하지 않았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다른 여느 청년들처럼 서울에 대한 막연한 동경 때문이었고, 둘째는 그가 ‘빨갱이의 딸’이란 것을 모두 알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정 작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공산당이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시절 정 작가가 느낀 감정은 다름 아닌 ‘좌절감’이었다.


“저는 글짓기만 하면 늘 1등을 하던 아이였는데, 당시 글짓기 대회의 주제 중 태반이 ‘반공’이었어요. 저는 ‘때려잡자 공산당!’을 외쳐서 상을 받던 사람이었는데 그 때려잡아야 하는 공산당이 제 아버지라는 걸 알았을 때 충격은 말로 하지 못하지요. 그래서 그 이후로 1년 동안 어머니를 계속해서 졸랐어요. 서울로 전학시켜달라고요. 근데 어머니께 빨갱이의 딸이라서 여기 못 있겠다고 하는 건 너무 미안해서 넓은 데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렇게 서울로 이사한 이후 정 작가에게 구례는 단순히 ‘부모님이 사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홀로 남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마흔이 넘어 구례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정 작가가 처음 구례로 왔을 때는 사람들의 이유 없는 친절이 불편하기만 했다.


“한 번은 뜬금없이 아버지 친구분께 전화가 와서는 ‘자네 우표 좋아하는가?’ 그래요. 거기에다 ‘아니요’라고 대답할 수 없어서 ‘어릴 땐 그랬는데 요즘은...’이라고 말했어요. 이틀 뒤에 집으로 라면 박스 두 개가 왔어요. 평생 수집하신 우표가 담긴 앨범들이었어요. 그 앨범들을 책꽂이에 꽂으니까 너무 커서 툭 튀어나오는데 자꾸만 불편하고 신경쓰이는 거예요. 한 5년 정도는 부모님의 사람들이 저에게 주는 호의가 그 튀어나와 있는 앨범 같았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구례에서 친구가 점점 늘어갔고, 아버지의 유산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착한 사람이 나쁜 짓을 저지를 리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 순간 아무도 빨치산에게 관심이 없는 지금에서야 비로소 빨치산인 아버지를 사람으로서 조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펜을 들어 한 문장을 썼다. "아버지가 죽었다."라고.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정 작가는 전 세대와 성별을 아울러 사랑받을 수 있게 된 까닭에는 민주화 운동의 주축이었던 5·60대 남성들과 이념에 상관없이 이야기를 들어준 2·30대 여성들이 있었다며 감사를 표했다.


한편 이번 행사는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재시작을 기념하여 이루어졌다.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참여정부 시절 ‘민주유공자법’이 만들어지며 시작되었으며 2007년 6월항쟁 20주년을 기념하며 비영리단체로 등록하였다. 이후 박창신 신부의 기록을 중심으로 각 운동가들이 소장하고 있던 자료를 모아 ‘민주화 운동사’와 관련 사진집을 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나, 정부가 바뀌고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활동을 멈추었다.


행사 직후 만난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장태영 사무처장은 ‘지난 3년 동안 민주화 운동을 기록화하여 후배들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관련 조례도 발표되며 상시적 조직을 다시 운영해보고자 한다. 9월 재건총회를 마친 이후 첫 행사로 정지아 작가와의 만남을 개최하여 시민들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가고 싶었다’고 전했다.


신동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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