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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3 | 문화현장 [사람과사람]
"아들아, 마음속 분단조국을 먼저 통일하마"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 조찬배씨
황경신 문화저널 기자(2003-03-26 16:45:53)

사랑하는 자식, 남편, 형제를 잃은 아픔을 딛고 고인(故人)들이 썼던 '민주의 가시관'을 대신 받아쓴 사람들이 있다.
하나뿐인 생명을 바쳐가며 목말라 외치던 그 뜻을 살아있는 가족들이 함께 실천해 나가는 것만이 그들의 원혼을 달래는 길이란 생각에 죽음의 참담함을 대신해 쉽지 않은 길을 나선 사람들이 모인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에서 올해 새롭게 회장직을 맡게 된 조찬배씨(66세)는 이 지역 출신인 조성만 열사의 아버지다. 조성만 열사의 아버지에서 이제는 수많은 청년들의 아버지로, 가족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부모 조찬배씨와 김복성씨(63세)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지울 수 없는 아픔을 남겼지만 그것들은 온전히 가족 모두에게 또다른 시간을 안겨주었다.
조성만 열사는 전북 김제 출생으로 전주 해성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재학시절 명동성당 청년연합회 소속 가톨릭 민속 연구회 활동을 시작으로 사회운동과 인연을 맺었다. 연구회 회장을 맡아오던 중 1988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양심수 전원 석방 및 수배자 해제 촉구 결의대회'에서 광주민중항쟁의 진상규명과 양심수 전원 석방, 자주적인 통일 등을 내용으로 한 5장의 자필 유서를 남기고 활복, 투신했다. 조성만 열사의 이같은 죽음은 사회운동내 통일운동의 대중화를 본격적으로 펼치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성만 열사가 생을 다한 88년, 가족들 누구도 그 죽음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어머니는 1년동안 동네 출입도 삼갈 만큼 세상과는 담을 쌓았고, 공직에 있던 아버지는 직장생활 자체가 큰 고역이었다. 조성만 열사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던 동생은 한달동안 학교를 결석하고 광주 망월동으로 술 한병을 들고 찾아가 이제는 말이 없는 형과 마주했다.
가족들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애써 감추며 아들의 죽음을 냉대하는 주위의 시선이었다.
"모두가 죄인이 된 것 같았어요. 집 주변에는 항상 감시하는 사람들이 서성였고, 전화통화도 자유롭게 하질 못했어요. 친구들, 친척들 모두 우리를 멀리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통일'이라는 말만 입에 올려도 보안법 위반으로 취급됐으니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성만이의 죽음을 헛되게 할 수는 없었고, 성만이의 그런 활동들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아 가족들이 그 못다한 뜻을 이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공무원 신분이던 아버지에 앞서 유가족협의회 활동을 먼저 시작한 것은 어머니였다. 유가족협의회에서 먼저 연락이 왔던 당시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아들의 죽음을 조용히 잠재우고 싶었지만 전국 각지에 흩어져있는 2백명이 넘는 유가족들과의 만남은 아들의 죽음보다 더 큰 아픔이었다.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한 전태일 열사,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목숨을 잃은 박종철 열사, 시위도중 경찰이 쏜 직격탄을 맞아 사망한 이한열 열사, 백골단에게 구타당해 내출혈로 끝내 사망한 강경대 열사뿐만 아니라 수많은 청년들이 독재의 서슬퍼런 칼날아래 생을 마감한 처절한 운명아래 있었다. 이 수많은 청년들을 우리는 가슴에 묻으며 그들로 인해 조금씩 변화되는 시대안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알려진 열사들이나 우리 성만이 같은 경우는 죽음의 경위나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전부터 지금 현재까지도 우리 유가족들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될 부분은 '의문사 진상규명'입니다. 가족의 생명이 흔적도 자취도 없이 사라진 의문사 진상규명은 민주열사들의 명예회복보다 더 힘든 일이고 시급히 해결돼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들이 남긴 유서에는 곧게 그어진 밑줄이 여러 군데다. 아들이 외친 조국의 통일이 어떤 모습인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통일공부'를 하며 아들과의 해후를 이뤘다.
한번도 외세의 간섭없는 독립국가의 모습을 갖지 못한 이 나라. 이 땅을 갈라놓은 것은, 갈라진 조국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은 남북의 민족이 아니었다.
"성만이의 죽음은 부모들에게도 사회가 변해야 한다는 의식을 심어줬죠. 어떤 명분을 내세우지 말고 조국통일이 돼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외세에 의해 분단이 된 사실은 이제 모두 알려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통일의 시간이 더디오는 것인지…. 정권유지를 위해 주체적으로 통일을 추진하지 않는 정치인들에게 많은 책임이 있습니다. 미국은 이제 이땅을 떠나야 합니다."
조성만 열사의 죽음은 통일운동 안에서도 자주통일, 미국의 간섭을 배제하는 반미운동에 더욱 큰 불씨를 당겼다. 당시 정의 구현 사제단 신부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이들이 통일문제를 고민하게 되었고, 89년에는 사제단의 결정으로 문규현 신부를 파북시키기에 이르렀다. 문규현 신부는 항소심 공판에서 "민족분단을 자신의 아픔으로 깨닫지 못하고 살아온 우리들 앞에서 조성만 군은 자기의 배를 가르고 분단이라는 것을 이렇게 피 흐르는 아픔이라고 가르쳐주고 간 겁니다.…그것은 누구를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교회를 향한 고발이고 겨레의 고통을 외면한 채 분단현실에 안주해 온 교회와 우리 사회를 향해서 근본적인 회개를 촉구하는 죽음이었습니다"고 심경을 밝혔다.

지난 시절, 불의한 세력에 의해 진실이 감춰지고 호도된 열사들의 죽음은 유가족들에게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두 번 묻는 일이었다. 나라사랑, 인간사랑을 위해 산화해 나간 고귀한 삶으로의 해석을 위한 명예회복 문제는 그래서 더욱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열사들의 명예회복 문제는 유가족들에게는 곧 '행정'과의 치열한 싸움이기도 했으며, 지난해 8월 명예회복을 한 조성만 열사의 경우에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세상속에서 잊혀져 가는 아들과 대면해야 하는 아픈 과정이었다.
"명예회복 서류에 성만이를 아는 사람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죠. 학교 다닐 때 우리집에 함께 놀러와 책가방 벗어던지고 놀러나가던 친구놈들 생각이 났는데,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쉽게 응해주지 않더군요. 아직도 성만이의 죽음이 아픈 탓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민주열사들의 명예회복이 어렵사리 진행되고는 있지만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여전히 세상은 두터운 벽으로 이들을 밀어내고 있다. 전주 생활을 뒤로 하고 서울에 상근을 하며 일을 봐야 하는 조찬배씨는 조속한 명예회복과 더불어 현재 '민주공원' 조성 사업으로 바쁘다. 정부의 약속과는 달리 사업 시행에 걸림돌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공원 조성 사업은 열사들의 묘를 한곳으로 이장하고 그 참된 뜻을 기리는 공간이 될 터이지만 예정됐던 장소가 서울시와 주민들의 난색 표명으로 철회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아직도 세상 사람들이 이들의 죽음을 자꾸만 헛되이 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유가족들의 가장 큰 짐인 의문사 진상규명 또한 조씨의 말을 듣자니 더욱 아득하기만 하다.
"의문사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양심선언'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신변보호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사회에서 그렇게 큰 용기로 일을 감행할 사람이 어디 쉽게 나타나겠습니까?"

한 해를 마감하며 발표되는 우리나라 최대 최고기록에는 이곳 유가족협의회의 이름이 끼어있다. 다름아닌 1년이 넘도록 진행된 '최장기 농성'이라는 영예 아닌 영예를 거머쥔 것. 하지만 이들이 원하는 것은 서류로 꾸며진 열사의 명예회복도 아니고, 최장기간 농성을 했다는 언론의 떠들썩한 뉴스도 아닐 터이다. 아들의, 형제의, 남편의 가슴속 어딘가에 아직도 식지 않은 세상에 대한 열망을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 그래서 조성만 열사의 아버지 조찬배씨는 오늘도 곧게 밑줄 그어진 아들의 유서를 새기고 길을 나선다. 사람들 마음속 분단조국을 먼저 허물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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