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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4 | 문화현장
[문화이슈] 창단 50주년을 맞은 창작극회
관리자(2011-04-12 15:55:28)

창단 50주년을 맞은 창작극회 

반세기를 이어온 근성이 우리의 힘이다 - 황재근 기자 


우리지역 연극의 산실인 창작극회가 올해로 창단 50주년을 맞았다. 반세기의 역사를 지닌 극단은 전국에서도 손에 꼽는다. “연극에서는 한강 이남으로 전주를 제일로 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주는 규모나 인구에 비해 연극문화가 발달한 편이다. 현재 전주에는 4개의 소극장과 10여개의 극단이 척박한 환경에서도 전주연극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 시초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1961년 창단한 창작극회가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50주년 기념 공연연습이 한창인 창작극회를 찾아 50주년을 맞는 소감과 각오를 들어봤다. 늦은 밤, 연습실 불은 꺼지지 않는다 늦은 저녁, 동문거리에 위치한 창작소극장 2층 창작극회 연습실에서는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소파에 둘러 앉아 대본을 읽는 배우들이 보인다. 창작극회 50주년 기념공연을 준비하는 단원들이다. 이번에 올리는 연극은 임연희 작가 원작의 <그 여자의 소설>이다. 지난 1998년 창작극회가 전북에서 처음 선보였을 당시 호평을 받아 여러 차례 앙코르 공연을 했던 작품이다.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우리 현대사의 격동기를 겪으며 기구한 역정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공연을 한 달 이상 앞둔 지금은 연극연습에서‘필 리딩’단계다. 말 그대로 감정을 실어 대본을 읽는 연습이다. 공연이 결정되면 먼저 대본 리딩을 통해 배역을 결정하고 그 다음 단계가‘필 리딩’단계다. 이후에는 직접 동선을 체크하며 연기를 하게 된다. 의상과 소품준비는 동선체크와 함께 진행된다. 무대 완성 후에는 시연회를 통해 최종점검을 한다. 여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게는 두 달, 길게는 세 달이나 걸린단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모여 연습을 하는 걸까? 박영준 단원은“단원 대부분이 낮에는 다른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수입이 거의 없기 때문에 낮에는 돈 버는 일을 하고 밤에 모이는 거죠. 그래도 대개 연극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박영준 단원 역시 낮에는 우진문화공간 예술극장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연습시간이 부족한 만큼 더 오랜기간을 잡고 공연을 준비하는 편입니다.”연극에 대한 열정이 아니고서야 고된 이중생활(?)을 버틸 수는 없는 일이다. 전북에 연극의 씨를 뿌리다 창작극회가 전주에 터를 잡은 건 지난 1961년이다. 전북대 극예술연구회 기린극회를 중심으로 한 30여명이 창립멤버가 됐다. 이 과정에서 중심이 된 건 초대대표 박동화 선생이다. 


선생은 1959년 희곡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가 신춘문예 당선되면서 연극 활동을 시작했고 전주에 내려온 이후 전북대 기린극회와 창작극회를 창단을 주도했다. 홍석찬 창작극회 대표는“전북지역에 연극의 씨를 뿌리신 분”이라고 말한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무대의 막은 올라야 된다’고 말씀하셨다고 해요. 극단 대표를 맡으면서 기획에 연출에 각종 서류·사무정리까지 맡아하셨는데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으셨겠어요. 그래도 마지막까지 일을 놓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분의 열정이 후대까지 미치고 있는 거죠.” 창작극회는 박동화 선생 사후에도 전북연극의 주축으로 활동하다 85년 전주시립극단의 모태가 됐다. 홍석찬 대표는 이 시기 시립극단을 통해 연극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세대다.“ 


당시 창작극회 단원들이 전부 시립극단으로 들어가면서 85년부터 87년까지 창작극회는 이름만 남아있는 상태였죠. 그러다 관립극단도 중요하지만 민간극단의 역할이 따로 있다는 생각에 다시 창작극회를 일으키게 됩니다.”이후 1990년 창작소극장이 문을 열면서 창작극회는 황금기를 맡게 된다. “당시는 창작극회는 이름답게 창작연극을 고수하고 있었어요. 마침 연극계에 우리 극 바람이 불면서 외국극도 우리식으로 번안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그 때 창작극회가 두드러진 거죠.” 50년의 역사 속에 고난과 역경도 많았다. 


홍대표가 기억하는 최악의 시기는 바로 1997년 창작소극장 화재 사건 때다. “이제는 공연을 못하는구나 하고 다들 낙담하고 있었어요. 그 때 지역의 예술가분들이‘창작극회 다시서는 10-1’이란 후원공연을 해주셨어요. 안도현, 김용택 시인이 극장 앞에서 시집을 파시고 그을음 가득한 극장에서 콘서트도 열었습니다. 그때 어려움을 이겨냈던 경험이 창작극회에 큰 재산이 된 것 같습니다.” “지역 연극계 맏형의 책임 다할 것” 다른 문화예술계도 마찬가지지만 현재 지역 연극계의 가장 큰 어려움은 인력난이다. “모든 문제가 인력난으로 귀결됩니다. 보다 대중들에게 맞는 연극을 만들고 2차 사업으로 연계시키기 위해서는 전문 기획자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있던 인력들도 빠져나가는 형편이라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홍대표는 장기적으로 몇 개의 동인극단을 제외하고는 인력을 공유하는 기획사 시스템이 도입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50년의 역사는 창작극회의 가장 큰 재산이다. 홍석찬 대표는“50년간 해왔고 그걸 어떻게든 이어가려고 했던 근성과 끼들이 창작극회의 저력”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역연극계의 맏형으로 갖게 되는 책임감도 적지 않다.“연극 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문화예술인들도 저희에게 항상 관심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부담감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관심도 함께 끌어안고 가야합니다. 서울을 따라가기만 하지 말고 전주만의 새롭고 독특한 연극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극단들 사이에서도 만남이 부족합니다. 창작극회가 먼저 나서서 교류의 장을 만들어볼 생각입니다.”창작극회는 50주년을 맞아 몇 가지 행사와 공연을 준비중이다.


4월 19일부터 24일까지 창작소극장에서 펼쳐지는 <그 여자의 소설>은 그 첫 번째다. 다음에는 창작극 <얼굴없는 천사>를 준비 중이다. 매년 연말 동사무소에 기부금을 놓고 가는 시민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9월에는 창작극회의 저력을 보여줄 만한 대형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나운규의 <아리랑>을 연극으로 재현하는 것. 이를 위해 전·현직 단원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 있다고. 창작극회의 50년을 종합하는 토론회와 창작극회 50년사 발간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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