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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 | 문화현장 [연중기획]
백제 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 8금산사(1)
윤덕향 고고학, 전북대교수(2003-09-08 10:16:27)

전북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의 하나로 금산사가 있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원년(서기 599년)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금산사지>에 실려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신라 혜공왕 2년 (서기 766년)에 완공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금산사의 경내에는 국보로 지정된 미륵전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주변에는 적지 않은 신흥종교들의 근거가 있다. 금산사를 중심으로 2차례에 걸쳐 살펴볼 예정이며 우선 이번에는 백제의 지역이었던 곳에 금산사라는 큰 사찰을 건립한 이유는 무엇일까를 삼국유사의 기록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 그 신앙형태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알아보려고 한다. 이를 통하여 금산사의 유적과 유물을 적절히 파악하고 더불어 전북지역의 미륵신앙을 개환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

1. 진표율사와 금산사
금산사의 창건이 백제 법왕 때라는 <금산사지>의 기록에 의하면 금산사는 법왕이 왕실의 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와는 다른 기록인 <삼국유사>에는 금산사가 진표율사에 의하여 경덕왕 때 짓기 시작하여 혜공왕 때에 개창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진표는 본디 완산주 만경현 사람으로 나이 12세에 출가하여 금산사 승제법사에게 배웠다고 한다. 이에서 보면 진표 이전에 이미 금산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때의 절이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는 자료는 없다. 다만 <금산사지>의 기록에 따라서 백제 때에 지어졌다는 생각도 가능하나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아직까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즉 백제시기에 속하는 유물이나 유적이 확인되지 않으며 진표 이전에 있었다는 사찰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것은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진표에 의하여 금산사가 크게 중창되기 때문이다.
진표는 출가한 다음 보안현에 있는 변산의 불가사의방에 들어가 도를 닦았으며 마침내 미륵보살과 지상보살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미륵과 지장보살은 그에게 점찰경(占察經) 2권과 간자(簡子) 189개를 주었으며 진표는 금산사를 크게 중창하고 높이 1장6척의 미륵불상을 만들어 미륵전 내에 모시게 되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기록에는 진표가 어렸을 때 개구리 30여 마리를 잡아서 버드나무 줄기에 꿰어두었는데 이를 잊고 있다가 그 다음해 봄에 그 개구리들이 슬피 울고 있는 것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 출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진표에 의하여 크게 중창된 금산사는 그 후 신라의 5교9산중 법상종의 근본도량으로서 위치하게 되었고 조선중기에는 전북지방의 사찰들을 관할하는 사찰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금산사의 창건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진표 이전에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의 금산사와 같은 규모와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진표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그 이후의 유물이 현재 금산사 경내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금산사 중창의 배경
위에서 금산사가 진표에 의하여 크게 중창되었음을 말하였다. 이에는 미륵과 지장보살이 등장하며 특히 미륵보살이 중요한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과 같이 실제로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이 현신하여 진표에게 간자(簡子)와 점찰경(占察經)을 주었다고는 현실적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금산사를 크게 중창하는 데에는 그것이 크게 작용하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신라의 왕실로부터 도움을 받고 신라 불교의 중요한 종파중의 하나인 법상종의 근본도량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는 단순히 설화만이 아니며 설화의 형태로 창건에 따른 배경을 말해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 진표가 출가하게 된 동기가 개구리를 보고 느낀 바가 있었다는 것과 그가 옛 백제의 탕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출가의 동기에 대한 설화에서 개구리를 사람으로 대치하면 당시 신라사회로부터 억압받고 있던 백제 유민들의 양상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점은 진표가 금산사를 중창함에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는 점에서도 이해가 되는 것이다. 즉 백제의 유민들에게 호응 받을 수 있는 요소가 진표의 신앙행위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그 자신이 백제의 유민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때 그의 신앙행위의 어떤 요소가 백제의 유민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 주목된다. 한편 그의 신앙행위가 백제유민들에게 어필하는 것이었다면 지배계층인 신라의 왕실로부터는 부정적인 반응을 얻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백제유민이라는 피지배계층과 신라왕실이라는 지배계층 모두에게 적합한 신앙행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점이 금산사를 성립하게 된 근본 바탕이 된 것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두 대립되는 집단을 통합하는 진표의 신앙행위는 미륵신앙이라는 것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진표가 금산사를 짓기 시작한 경덕왕은 혜공왕의 아버지로 전제왕권을 강화한 임금으로 일려져 있다. 선제왕권을 강화하려는 경덕왕이 백제유민들의 거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김제에 금산사를 중창한다는 것은 얼핏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김제의 인근에 있는 부안의 주류성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운동이 마지막까지 있었으며 그 같은 지역에 기존사회에 대한 변혁을 합리화할 수 있는 미륵신앙의 거점을 마련한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것처럼 보인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는 두 가지 요소가 지적될 수 있다. 첫째는 경덕왕 개인의 특성과 관련이 있으며 다른 하나는 미륵신앙의 속성에서 찾을 수가 있다. 경덕왕은 전제왕권을 강화하는 방안의 하나로 직계자손에의 왕위계승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같은 직계자손에의 열망은 경덕왕이 아들이 없자 표훈이라는 스님에게 부탁하여 아들을 구하는 설화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 설화에 의하면 아들이 없는 경덕왕은 왕비를 쫓아내고 다른 왕비를 들였음에도 역시 아들이 없자 표훈에게 부탁하여 천제에게 아들을 부탁하였다. 이에 표훈이 하늘에 올라가서 아들을 부탁하자 천제가 딸이면 되나 아들이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같이 왕에게 말하자 왕은 아들을 바란다고 다시 부탁을 하도록 하였다. 표훈이 다시 하늘에 가서 부탁하자 아들을 얻게 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고 하였는데 그럼에도 왕이 아들을 바라므로 얻게 된 것이 혜공왕이다.
실제로 혜공왕 때부터 신라는 차츰 쇠퇴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이는 신라의 쇠퇴를 말하는 설화이기도 하지만 다른 면으로는 경덕왕이 가진 불교에 대한 관념의 일면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즉 현세에서 부탁하여 어떤 소원을 이루고자하는 의식이 있으며 주술적인 속성에 집착하고 있는 면을 볼 수가 있다. 경덕왕의 이런 속성은 그가 스님들에게 부탁하여 짓게 한 도솔가나 안민가와 같은 신라의 향가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즉 통치에 있어서도 부처의 신비로운 힘을 이용하려는 의지가 보이며 이런 취향은 불교를 이용하여 전제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즉 금산사의 창건에는 경덕왕의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을 것이며 그 개인의 취향도 고도의 이념체계로서의 불교가 아니라 주술적 속성이 강한 면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진표의 신앙형태는 미륵신앙이라는 속성과 미륵으로부터 그가 받았다고 전해지는 점찰경(占察經)과 간자(簡子)와 더불어 경덕왕의 정치적 의도와 개인적 취향과 부합되는 것이다.
점찰경(占察經)은 중국 당나라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상권에는 인간의 선악의 각종 업보와 이에 따라 현세의 길흉을 점치는 방법이 있고 하권에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각종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간자(簡子)는 나무로 깎아 만든 것으로 점을 칠 때 벌려 놓는 것으로 그에 의하여 선악과 길흉을 점치는 도구인 것이다. 이런 점찰이나 간자(簡子)의 개념은 개개인의 현세에서의 각종 길흉이나 재난이 이미 전생에서의 업보에 의하여 예정 된 것이나 이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까지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술적인 속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궁극적으로 진표가 제시하고자 했던 신앙은 아마도 미륵신앙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미륵신앙은 크게 보았을 때 미륵 상생신앙과 하생신앙으로 나눌 수가 있다. 어쨌거나 그 주된 요체는 내세에 미륵이 나타나서 3번의 설법을 통하여 중생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이 3번의 설법에 의하여 구제된 중생은 용화세상이라는 인간세상의 온갖 번민과 고통이 없는 세상에 살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앞날의 구원이라는 점에서 미륵은 기독교에 메시아신앙과 상통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미륵은 이 3번의 설법을 통하여 중생을 구제하는데 이 설법을 용화3회(龍華三會)라고 한다. 이때 첫 번째 설법에 참여하는 사람과 그 다음 설법 및 마지막 설법에 참여하는 사람은 각기 구분되는 사람들이며 이는 불교에서 모든 중생을 상생인, 중생인, 하생인으로 나누는 것과 관련되어진다. 어쨌든 각종 중생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미륵에 의한 구원이 가장 포괄적인 것이다.
미륵신앙에서는 이 설법에 참여하기 위한 자격으로 율법을 준수할 것이 요구되어진다. 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단지 부처의 율법만이 아니고 사회집단의 율법도 잘 키기는 사람이면 왕의 명령도 충실히 따를 것이며 이는 신라 왕실을 부정하려는 속성이 강한 백제유민에게 신라왕실의 율법을 잘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경덕왕의 금산사를 크게 짓도록 도와준 이면에는 이 같은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또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 개인이 신비, 또는 주술적인 불교신앙형태에 의존하고 있었던 데에도 기인하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3. 일반민중의 미륵신앙
금산사를 중창함에 신라왕실의 도움이 있었고 그것이 정치적인 의도에 의한 것과 경덕왕 개인의 신앙적 특성에 기인하는 면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일반 백제 유민이 그에 동조하고 있는 점은 계속 의문으로 남게 된다. 이점은 미륵신앙과 관련지어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간략히 말한 바와 같이 미륵신앙에는 기독교의 메시아 적인 요소가 있다. 그에 따라서 현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장래에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한다면 현세의 온갖 어려움을 참고 견딜 수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구원에의 희망인 것이며 이 희망이 없다면 그의 생활을 지극히 비참할 것이다. 한편으로 이 같은 희망이 강력히 표출되면 현세를 빨리 떠날 수 록 극락에 빨리 오르게 되며 현세에는 가급적 짧게 머무는 것이 좋다는 염세적인 의식이 싹틀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메시아가 언제 올지는 모르나 가급적이면 자신이 살고 있는 지금, 그것도 가급적 빨리 올수록 좋은 것이다. 미륵을 기다리는 이런 형태의 바람은 미륵이 오기 전 단계의 사회가 기근과 질병, 전생과 지배계급의 착취 등과 같은 부정적인 것으로 가득 찬 것이라는 점에서 현실이 가혹할수록 미륵의 출현이 가까워진다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진표의 미륵신앙은 가혹한 현실에 시달리고 있는 일반 민중, 특히 백제의 유민들에게는 희망을 주는 것이며 현실이 가혹할수록 미륵의 출현이 가까워진다는 믿음을 통하여 현실을 극복 할 수 있는 정신적인 기반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미륵신앙이 진표에 의하여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아니며 이미 삼국시대에 한반도에 전래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진표에 의하여 금산사가 중창된 것은 삼국시대의 긍정적 미륵신앙-미륵上生신앙-이 신라에 의한 백제의 멸망과 더불어 부정적 미륵신앙-현실부정적인 미륵下生신앙-으로 변질되고 더욱 점찰경(占察經)의 도입이라는 주술적 속성과 결합됨으로서 일반 민중의 호응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다음번에는 이 같은 신앙형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유적 유물에 반영되고 또 현재에 위치에 금산사가 입지한 이유가 무엇일까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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