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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8 | 문화현장 [백제기행]
다시 솟는 불길, 2차 봉기의 여정을 가다
155회 백제기행_다시 갑오년, 동학기행 둘
방재현 객원기자 (2014-08-01 18:17:15)

19세기말, 조선은 왕조 시대가 막을 내릴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총체적 난국에 접어들고 있었다. 왕권이 실추 되니 국력은 약화되고 부패한 관료들이 백성들을 수탈과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으니 조세부담은 갈수록 늘어갔고 고리대금업이 만연하니 물가는 청정부지로 치솟아 올랐다. 게다가 조선을 식민지화 하려는 외세의 침략이 잇따랐으니 민중들의 삶은 피폐해져만 갔고 여기저기서 도탄에 빠진 통곡이 이어졌다. 이에 보국안민(輔國安民) 기치와 함께 힘을 모은 이들이 있었으니 수십만의 농민들이 뜻을 같이 하였다. 

동학농민혁명, 번째 다시 찾은 갑오년, 가쁘게 흘러갔던 역사의 현장을 찾아간다.


농민군의 기반이자 퇴로였던 김제 원평 일대를 돌아보고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 원평과 구미란 사이, 첫발을 내딛는 곳은 번째로 봉기한 농민군이 공주 우금티 전투에서 대패한 , 사활을 최후의 결전이 펼쳐진 곳이다. 봉기 , 전주성에서 관군과 맺은 화약으로 집강소를 통한 자치를 인정받은 농민군은 자진해산한다. 그러던 , “나라를 구하라 대원군의 밀사를 받게 되고 경복궁을 무장점거 하던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재차 봉기가 이루어졌다. 

멀리 격전의 현장이었던 구미산이 바라다 보인다. 농민군은 지형상의 이점을 이용해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진군해오는 관군과 일본군에 대해 전력을 다해 맞섰을 것이다. 그러나 화력의 열세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관군과 일본군이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반면, 민가의 대부분은 불타올랐고 소나무 숲에는 무명의 봉분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격전의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무거운 발걸음을 돌린다.


번째 봉기 이후, 전라도 53 군현에 설치된 집강소 체제는 비록 존속기간이 7개월에 불과했지만 정부와 농민이 상호협력관계를 유지한다는 관민상화(官民相和) 원칙으로 농민에게 일정 부분 자치권을 인정하고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려고 했던 유래 없는 제도였다. 김덕명이 주도했던 원평의 집강소는 가장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덕명은 김제의 금구를 담당하던 동학교단의 대접주로 거사 후로는 농민군 지도자들의 참모와 고문역을 도맡다가 집강소가 설치되자 농민들을 적극적으로 구제하는 한편 토호들도 해하지 않는 선정을 펼치게 된다.

80년대 중반, 후손들은 김덕명과 당시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수백기의 농민군 무덤이 있는 언덕 이편에 추모비와 추모각을 세웠다. 현장은 현재까지도 보존되고 관리되고 있었다. 반면 원평의 집강소 터를 찾은 일행은 다소간의 실망감과 안타까움을 감출 없었다. 건물은 외관만 유지하고 있을 매물로 나와 있다는 현수막과 함께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 모습을 있었다. 농민의 자주정신을 일깨웠던 집강소가 시대는 물론이고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가치와 의미가 있다면 집강소를 지켜 내려는 노력들이 조만간 성과를 거둘 있기를 기대한다. 


머지않은 곳에 위치한 농민군의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이 혼인 잠시 머물렀다는 공장의 창고 터는 이제는 비닐하우스가 대신하고 있었다. 자동차도 전화도 없던 시절, 불철주야 종종걸음으로 사람들을 만나고자 고을, 고을을 오가는 동안 다리 뻗고 편히 있었으랴.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심에서 비롯된 가렴주구(苛斂誅求) 극에 달하자 전봉준은 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기에 이르렀고 5 단신으로 수천의 군중 앞에 서서 열변을 토한다. 전봉준은 가지 군율을 정했으니, 하나는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것이요. 둘은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것이다. 셋은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 깨끗이 것이요. 넷은 서울로 진격하여 세도가들을 몰아낼 것이었다. 


전주성 무혈입성을 거쳐


전봉준 생가 터를 뒤로하고 원평에서 점심을 해결한 일행은 전주로 향했다. 용머리 고개, 지금은 구릉을 따라 시원하게 도로가 뚫려 있지만 농민군이 지나갈 때는 넘어야 언덕이었을 것이다. 당시 용머리고개는 전주로 들어가는 숨구멍이었고 농민군에게는 전주진입에 대한 상징이기도 했다. 용머리고개를 넘은 농민군은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전주성에 입성했고 이는  쾌거가 되었다. 용머리고개 육교에 올라 주위를 둘러본다. 따가운 햇볕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상쾌해 진다. 잠시 조금 이동하여 완산칠봉 중턱까지 걸어 올라갔고동학농민군전주입성비동학전적기념비 마주하며 전주성입성의 의미를 재확인했다.  


다시 일어선 봉기 현장, 삼례로 간다


이제 삼례로 간다. 농민군이 삼례를 2 봉기의 집결지로 삼은 것은 삼례가 교통의 요지였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삼례는 전주에서 가까운 데다 서울로 가기위해서는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당시 삼례는 마을은 아니었지만 평야지대를 끼고 있고 주막이 많은 편이어서 많은 인원이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하기에 용이했다. 또한 동학 교조 최제우의 누명을 풀어 원을 벗기고 포교의 자유를 얻고자 했던 교조신원운동의 대규모 집회가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일행이 삼례에 이르러 먼저 찾은 곳은 서울로 향하던 군중들이 모였던 자리에 세워진삼례봉기기념비’, 그러나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가, 비석주위는 잡풀이 무성하고 비석 둘레를 둘러치고 있던 주변의 돌들은 넘어진 방치되어 있다. 사실 일행은 버스를 타고 번을 오고간 끝에서야 비석을 찾을 있었다. 큰길 쪽으로 조금만 가까운 곳에 세워졌다면 이렇게 잊혀 지거나 방치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을 낳게 한다. 따가운 햇살에 표정을 숨긴 일행은 서둘러 다음 행선지를 향해 버스에 올랐다.


마지막 행선지는삼례봉기 역사광장이다. 광장은 2003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조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선은 큼지막한 조형물과 기념비들이 눈에 들어온다. 밭을 갈던 농부는 살기 위해 손에 쇠스랑을 하늘 높이 솟아 올렸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간다. 폐정개혁 12조는 구습을 타파하고 누구나 있는 세상을 염원한다. 피로 물들었던 반란의 고향은 이제 새로운 조명을 받고 역사적 재평가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시대를 앞서 내다본 그들의 육신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정신은 남아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영혼을 울린다. 동북아의 근현대사를 넘어 세계사의 흐름 속에 의의를 새기고 발자취를 남기게 날을 기원하며 일정 내내 가는 곳마다 풍부한 사료와 문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준 소설가이자 <봉준이 온다> 저자인 이광재씨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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