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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8 | 기획 [전북에 가야사가 온다 ②]
백두대간 속 전북가야는 과학이다
곽장근(2017-08-28 14:32:04)



운봉고원 기문국 철의 왕국이다
흔히 '신선의 땅'으로 널리 회자되고 있는 운봉고원은 한마디로 철광석의 산지이다. 달리 지붕 없는 백두대간 속 '철 박물관'이다. 운봉고원의 철광석은 니켈이 다량으로 함유되어 철광석 중 최상급으로 평가받는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운봉고원의 철광석이 만나 새롭게 탄생된 것이 운봉고원의 제철유적이다. 최근까지 진행된 지표조사를 통해 30여 개소의 제철유적이 운봉고원에 밀집 분포된 것으로 밝혀졌다. 철광석의 채광부터 숯을 가지고 철광석을 환원시켜 철을 추출해 내는 제철공정을 한 자리에서 살필 수 있다. 지리산 국립공원 내에 자리하여 이제 막 문을 연 철의 유적공원을 연상시킬 정도로 제철유적의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에 가까워 대자연의 원시림을 방불케 한다.
2100년 전 마한의 왕이 전쟁을 피해 달궁계곡으로 피난을 가 그 곳에서 70년 이상 나라를 다스렸다. 초기철기시대 때 최고의 테크노밸리로 주목을 받았던 전북혁신도시에 정착했던 선진세력과의 관련성이 깊을 것으로 추측된다. 180여 기의 말무덤과 가야계 고총으로 상징되는 운봉고원 가야세력은 150년 넘게 가야계 소국으로 발전했다. 아마도 삼국시대 때 대규모 철산개발로 가야의 영역에서 거점지역으로 융성했을 것으로 점쳐진다. 가야계 고총에서 나온 토기류는 '가야토기 박물관'을 방불케 했는데, 당시에 철의 생산과 유통이 담긴 물물교역, 즉 현물경제의 증거물이 아닌가 싶다. 동시에 가야의 시작부터 멸망까지 백제와 등을 맞댄 어려운 상황 속에서 최고의 가야문화유산을 운봉고원에 남겼다.
요즘 고고학계의 이목이 온통 철의 메카인 운봉고원으로 쏠렸다. 운봉고원 내 남원 월산리 가야계 고총인 M5호분에서 중국제 청자인 계수호가 그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백제왕 주요 하사품으로 알려진 최상급 위세품의 하나로 종전에 익산 입점리와 공주 수촌리, 천안 용정리, 서산 부장리 등 백제의 영역에서만 나왔다. 신라의 천마총과 황남대총 출토품과 흡사한 철제초두를 비롯하여 금제 귀걸이, 갑옷과 투구, 경갑, 기꽂이 등 가야계 위신재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남원 두락리 32호분에서는 공주 무령왕릉 출토품과 흡사한 수대경과 금동신발이 출토됐다. 금동신발을 비롯하여 수대경, 철제초두, 계수호는 가야의 영역에서 한 점씩만 나온 최고의 유물들이다.
운봉고원의 아영분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풍천을 사이에 두고 아영면 월산리에서 동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아영면 두락리·인월면 유곡리가 있는데, 이곳에도 40여 기의 가야계 고총이 무리지어 있다. 이 일대에는 봉토의 직경이 30m 이상 되는 초대형급 가야계 고총도 산자락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어, 당시 철의 왕국인 기문국이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융성했다는 발전상도 방증해 주었다. 그리고 40여 기의 가야계 고총이 한 곳에 무리지어 있기 때문에 운봉고원의 기문국이 상당 기간 동안 존속했음을 암시해 주었다. 운봉고원에 지역적인 기반을 두고 가야계 소국으로까지 발전했던 운봉고원의 가야세력을 기문국으로 부르고자 한다. 중국과 일본 기록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가야계 소국이 기문국이다.
1500년 전 기문국의 지배자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시신과 유물을 부장하기 위해 냇돌과 깬돌로 매장공간을 만들었는데, 남원 월산리 M5호분은 그 길이가 960cm로 고령 지산동 등 다른 지역의 가야계 고총들보다 훨씬 크다. 이처럼 가야계 고총에서 매장주체부의 길이가 큰 것은 무덤의 주인공이 죽어서도 살아생전의 권위와 신분을 그대로 누릴 거라고 믿었던 계세사상이 널리 유행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운봉고원에서 철의 왕국으로 융성했던 기문국의 발전상을 뒷받침해 주는 유일무이한 고고학적 증거이다. 아직도 관리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않고 있지만 가야계 고총의 규모와 그 기수는 대가야 지배자의 무덤으로 밝혀진 고령 지산동 서쪽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운봉고원 일대가 6세기 전반 이른 시기 백제 무령왕 때 백제에 정치적으로 편입됨으로써 철의 왕국 기문국이 521년 이후부터는 더 이상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다. 백제는 기문국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에 패배함에 따라 그 주도권을 상실한다. 남원 두락리 2호분과 봉대리 2호분에서 출토된 신라의 단각고배를 근거로 6세기 중엽 경에는 운봉고원이 신라의 영향권으로 편입됐음을 증명해 주었다. 562년 대가야를 비롯한 백두대간 동쪽 가야계 소국들이 모두 신라에 정치적으로 복속되면서 마침내 백두대간 산줄기에서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 형성됐다. 백제 무왕의 20년 이상 지속된 신라와의 아막성 전쟁도 '철의 전쟁'으로 운봉고원의 철산지를 탈환하기 위한 백제의 국가전략이었다.


진안고원 장수가야 봉수왕국이다
백두대간 산줄기 서쪽에 진안고원이 있다. 달리 '호남의 지붕'으로 불리는 곳으로 전북 장수군·진안군·무주군과 충남 금산군이 여기에 속한다. 백두대간 동쪽 운봉고원도 지질 구조상으로 진안고원에 속한다는 주장도 큰 관심을 끈다. 1억 년 전 중생대 마지막 지질시대인 백악기 때 호수였는데 지각 변동으로 융기해 해발 300m 내외의 산악지대를 이룬다. 선사시대 이래로 줄곧 지정학적인 이점을 살려 교통의 중심지이자 전략상 요충지를 이루었다. 삼국시대 때는 백제와 가야, 신라가 철산지인 진안고원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각축전을 펼침으로써 백제와 가야,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공존한다.
우리나라의 국토를 동서로 갈라놓는 백두대간 산줄기 서쪽에 장수가야가 있다. 금강 발원지 신무산 뜬봉샘이 자리하여 수계상으로는 금강 최상류를 이룬다. 낙동강유역에 속한 운봉고원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가야계 소국인 기문국과는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 산줄기들로 가로막혀 별개의 독립된 지역권을 형성하고 있다. 진안고원의 장수군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장수가야는 가야영역의 서북쪽 경계로 줄곧 백제와 국경을 맞댄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가야문화를 기반으로 가야계 소국으로까지 발전했다. 백두대간 산줄기 서쪽에서 유일하게 가야계 소국으로까지 발전한 가야왕국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 사이 진안고원 내 장수군에 삶의 터전을 둔 장수가야는 5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등장해 가야계 소국으로 발전하다가 6세기 초엽 경 백제에 복속됐다. 금남호남정맥의 산줄기가 백제의 동쪽 진출을 막았고, 사통팔달했던 내륙교통망의 장악, 대규모 철산개발, 한성기 백제의 간선교통로가 통과하지 않는 지정학적인 이점도 크게 작용했다. 이를 배경으로 장수 동촌리 말무덤이 계기적인 발전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250여 기의 가야계 중대형 고총이 진안고원의 장수군에서만 발견됐다. 장수 동촌리 가야계 고총에서 처음으로 말발굽이 출토됨으로써 장수가야가 철의 생산부터 주조기술까지 응축된 당시에 철의 테크노밸리였음이 입증됐다.
금강 상류지역에서 가야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웠던 장수가야는 80여 개소의 봉수로 상징되는 봉수왕국이다. 봉수는 낮에는 연기와 밤에는 횃불로써 변방의 급박한 소식을 중앙에 알리던 통신제도이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근대적인 통신제도가 도입되기 이전까지 개인정보를 다루지 않고 오직 국가의 정치·군사적인 전보기능만을 전달했다. 그리하여 가야계 왕릉 못지않게 가야계 소국의 존재를 반증해 주는 가장 진솔한 고고학 자료이다. 문헌에 등장하는 가야계 소국인 반파[伴跛(叛波)]가 513년부터 3년 동안 운봉고원 기문국을 두고 백제와 갈등관계에 빠졌을 때 봉수를 운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안고원에서 삼국시대 봉수가 그 모습을 드러내 역사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현재까지 80여 개소의 봉수가 진안고원의 장수군을 여러 겹으로 에워싸듯이 배치되어 있다. 그렇지만 백두대간 동쪽에서는 여전히 삼국시대 봉수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진안고원의 장수군에 집중적으로 배치된 봉수는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장수군으로 통하는 내륙교통로가 잘 조망되는 산봉우리에 입지를 두었다. 그리고 산봉우리의 정상부에는 대체로 돌이나 흙으로 장방형의 단을 만들고 돌로 쌓은 석성을 한 바퀴 둘렀다. 조선시대 봉수가 돌로 연대를 쌓고 그 위에 연조를 설치했던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런데 봉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봉수로의 최종 종착지가 어딘가이다. 충남 금산군과 전북 무주군·진안군·임실군, 남원시 운봉읍에서 시작된 여러 갈래의 봉수로가 모두 장수군에서 만난다. 조선시대 때 전국의 5대 봉수로가 서울 남산에서 합쳐지는 것과 똑같다. 삼국시대 봉수는 가야계 소국의 존재와 함께 전북가야의 영역을 증명해 주었다. 전북 동부지역 봉수로의 최종 종착지가 진안고원의 장수군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이 봉수들의 운영주체는 장수가야와의 관련성이 가장 높다. 문헌에 등장하는 20여 개 이상 되는 가야계 소국 중 장수가야는 250여 기의 가야계 고총과 120여 개소의 제철유적을 남긴 철의 왕국이자 봉수왕국이다.
이제까지의 지표조사에서 삼국시대 토기편보다 그 시기가 늦은 고려의 청자와 조선의 백자가 발견되지 않았다. 봉수에서 채집된 유물은 봉수의 설치시기 및 운영주체를 추정하는데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 백두대간 영취산·봉화산 봉수, 금남호남정맥 원수봉 봉수 발굴조사에서 그 운영시기가 5세기 말엽부터 6세기 초엽까지로 밝혀졌다. 아마도 백제가 정치적인 불안에 빠졌을 때 백제영역으로 진출한 장수가야가 백제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운영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동시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삼국시대 봉수들로 그 존재만으로도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인류의 역사 발전에서 공헌도가 가장 높은 것이 철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고대국가를 출현시켰고, 대가야가 후기가야의 맹주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도 철의 힘이다. 삼국시대 제철유적의 밀집도가 가장 높고 철기문화의 역동성을 보여준 곳이 전북 동부지역이다. 운봉고원은 가야영역에서 최초로 그 모습을 드러낸 철제초두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철기류가 모습을 드러낸 '철기박물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북 동부지역에서 발견된 400여 기의 가야계 고총은 대부분 잡목과 잡초 속에 갇혀 있거나, 지금도 봉분의 정상부를 평탄하게 다듬어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이처럼 운봉고원과 진안고원 속 가야계 고총에 대한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있는 것은, 전북가야에 대한 역사 인식의 결여와 무관심에서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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