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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 | 기획 [문화로 지역 읽기]
우리는 지역에서 ‘문화’하는 중입니다
장수
고다인 기자·류나윤 기자(2024-01-10 11:16:06)

신년기획 | 문화로 지역 읽기

우리는 지역에서

‘문화’하는 중입니다

인구감소와 지방소멸. 원 플러스 원처럼 나란히 붙어 다니는 두 용어는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른지 오래다. 인구감소 지역으로 지정된 89곳 중 단 네 곳을 제외한 85곳은 비수도권에 위치하고 있다. 사람으로부터 문화가 꽃피고 예술도 샘솟는 법이니 도시와 농촌의 문화 격차는 날이 갈수록 벌어지고, 청년들은 나고 자란 지역을 떠나 수도권으로 향한다. 미술관과 공연장, 영화관이나 도서관 등 도시에서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던 공간들이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

군 단위의 작은 지역들이 겪는 문화적 소외는 어쩌면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 않을까. 지역 사회를 이루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순위를 매긴다면 문화는 가장 마지막에야 챙기는 4순위쯤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삶에는 문화가 필요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혼란했던 시절, 우리나라가 부강한 나라보다는 문화로서 아름다운 나라가 되길 꿈꾸며 김구 선생이 남긴 글이다.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도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문화의 힘을 우리는 저버려선 안 된다.

또 다시 새로운 1년을 맞이하는 때. 문화저널은 지방소멸의 시대에도 꿋꿋이 문화의 힘을 지켜가는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신년 기획 ‘문화로 지역 읽기’는 전주를 제외한 13개 시군의 작은 동네와 마을, 그 안에서 문화를 동력삼아 움직이는 사람들을 만난다.

첫 주자는 ‘무진장’이라는 별칭으로 함께 불리는 무주, 진안, 장수 지역이다. 세 곳 모두 인구 2만 명이 조금 넘는 작은 고장에 속한다. 그만큼 문화시설은 적고 활동가들이 처한 환경은 열악하다. 하지만 도시에는 없는 아름다운 자연이 있고 그 지역만의 역사와 문화유산, 예술이 있다. 그 자체로 충분한 문화를 품고 있다. 오롯이 군민들이 모여 무대를 꾸미는 극단, 지역에 새로운 문화를 뿌리내리는 청년들, 시골 풍경을 무대 삼아 예술을 펼치는 무용단, 조용한 마을에 책방을 열거나 영화제를 만드는 일. 이 흥미로운 활동들이 모두 전북의 작은 지역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장수


최근 3년 사이, 장수 지역의 문화판에는 새로운 소식이 많이 들려왔다. 2022년 계북면에는 20년 가까이 손인형극을 선보여온 극단 누렁소가 만든 인형극 전문극장 ‘꼭두인형극장’이 문을 열었다. <제1회 전국 인형극제>를 열고, 지속적으로 정기공연을 펼치는 등 공간이 생겨나니 관련 문화를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폐교된 초등학교를 문화예술촌으로 탈바꿈해 운영해 온 ‘장안문화예술촌’은 같은 해, 문화예술 교육 전용시설로서 역할을 더하며 ‘장수 꿈꾸는 예술터’가 되었다. 지역의 자연환경과 농촌문화가 문화예술로 이어지는 현장을 만들어내며 장수를 대표하는 문화시설이 되고 있다.

천천면의 한 마을에서는, 한여름 장수의 푸른 논밭과 잘 어울리는 영화제가 열렸다. 마을 이름을 딴 ‘섶밭들산골마을 영화제’다. 이 작은 고장에서는 최초로 열린 영화제였다. 주민 모두 함께 참여해 지난해까지 2회를 맞이하고, 올해 세 번째 영화제를 준비하고 있다. 다양한 움직임 속에서 청년들의 활약도 빛났다. 각자의 사정과 이유로 장수에 모인 젊은이들이 만든 공동체 ‘장수청년 산사공’을 중심으로 동네 곳곳엔 소소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영화제와 청년공동체, 이들의 활동은 지역 안에서뿐만 아니라 지역 밖의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역할에도 앞장서고 있다. 가장 ‘장수스러운’ 매력으로 지역 문화의 폭을 넓히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에 주목해봤다.


프로 N잡러들의 지역살이

청년 공동체 ‘장수청년 산사공’


                                      왼쪽부터 김민지, 임유정 '산사공' 공동대표

여러 개의 직업을 가진 이른바 N잡러가 이제는 흔해진 세상이 왔다. 조용하던 장수의 한 마을에도 프로 N잡러들이 살고 있다. ‘산사공’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하고 있는 네 명의 청년이다. 낮에는 커피를 내리는 카페 사장님, 밤에는 글 쓰고 그림을 그리는 작가, 로컬 상점의 주인, 책을 펴내는 기획자 등등 이들에겐 하루가 모자라다. 산사공의 공동대표인 김민지 씨는 본격적인 작가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고향인 장수에 돌아왔다. 지역주민사업체를 통해 임유정 공동대표를 만나며 지금 장수에는 청년이 필요하다는 현실에 공감했다. 이후 김승석, 차준서 씨가 구성원으로 함께하며 2021년 청년 공동체 산사공이 탄생했다. 이름에 담긴 뜻은 ‘산으로 간 사공들’. 사공이 비록 산으로 향하더라도 길을 잃었다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디든 나아갈 수 있다는 낭만적인 포부를 담았다. 이름처럼, 매번 확신은 없지만 일단 머리를 맞대고 부딪치는 게 이들이 지역에서 살아남는 방식이다.

청년이 행복한 동네를 위해

산사공의 활동은 크게 교육과 공간으로 나뉜다. 장수군의 부족한 아동돌봄 환경을 위해 청년들의 재능과 경험을 아이들에게 공유하는 ‘아이온 놀이배움터’를 운영 중이다. IT부터 언어, 스포츠, 그림 등 놀이를 통해 아이들 스스로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도록 돕고 있다. 공간적으로는 이들의 아지트와 같은 ‘영한상점’을 활용하고 있다. 청년들이 만든 공예품이나 농산물 등의 지역상품을 판매해 판로를 개척하고, 시골 마을에선 보기 힘든 제로웨이스트 물건들을 판매한다. 언제든 커피 한 잔 할 수 있는 카페도 운영하며 한쪽에는 아주 작은 책방도 마련했다. 흩어져있는 청년들이 모일 수 있는 하나의 공간만으로 많은 실천이 가능해졌다.

“순수한 수입만으로 이곳을 유지하기는 사실 어려워요. ‘지역 청년활동가 지원사업’같은 외부 지원사업들을 찾아가며 공간을 지켜가고 있어요. 도시에서 50평짜리 카페를 연다는 건 상상하기도 어렵잖아요. 근데 여기에서는 조금만 힘을 보태면 가능해요. 그래서 필요한 게 있다면 주저 없이 시도했던 것 같아요. 바리스타가 필요하면 ‘그래, 배우자!’하고 바로 배웠어요. 그러다 베이킹도 배우고.. 저희 일상이 되게 버라이어티해요.”


                                      산사공이 운영하는 로컬카페 '영한상점'

요즘 배우고 있는 일은 잡지 만들기다. 올해 새로운 로컬 잡지 제작을 계획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지역의 좋은 점을 전하고, 귀농귀촌을 권하는 내용이 아닌 지역에서 살아가는 삶을 다양한 시각에서 현실적으로 담고자 한다. 이들은 이미 지난 2021년, 전북문화관광재단 청년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장수에 사는 열다섯 명의 청년 이야기를 기록한 책 ‘어쩌다, 장수청년’을 발간한바 있다. 당시 청년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책으로 담고 싶었던 이유는 기성세대에 대한 외침이기도 했다. 지역에 영향력을 미치며 살고 있지만 여전히 청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현실에 작게나마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처음 저희가 지역의 현실을 깨달았을 땐 굉장히 전투적이었던 것 같아요. 장수군의 1년 예산 중 청년을 위해 쓰는 돈은 1%정도밖에 안되더라고요. 지역에 청년이 필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막상 현실에선 청년들을 잘 믿어주지 않는 것 같아요. 누군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청년은 계속해서 소외받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토크콘서트를 열기도 했어요. 청년들이 느끼는 어려움들에 대해 의견을 공유하고 대놓고 질문하는 자리를 가졌죠. 이런 노력을 통해 크진 않지만 조금씩이라도 나아지고 있는 걸 느껴요.”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얼굴에는 왠지 밝은 열정이 보인다. 장수에 살아가며 느끼는 이곳만의 매력과 가치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장수 안에는 매력적인 소재들이 넘쳐난다. 역사와 인물, 문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살아있다. 그러나 이런 소재들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채 멈춰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많은 청년 예술가들이 장수로 찾아와 이곳만의 콘텐츠를 발굴하고 함께 커뮤니티를 만들어가고 싶은 것이 앞으로의 작은 바람이라면 바람이다.

넘기 힘든 크나큰 산처럼 느껴져 모든 게 어렵게만 느껴졌던 지난날의 나는

부딪혀 보기도 전에 기가 죽어 피하거나 숨기 바빴다.

하지만 장수에 다시 살아보기로 하면서 더 이상 피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결심은 ‘네가 커봤자 얼마나 큰데? 에라이, 쾅!‘하고 부딪혀 보았다.

내가 먼저 나가 떨어지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실상 겪고 보니 말랑말랑한 풍선 같은 장애물 일 뿐이었다.

맷집이 세진 건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나는 추진하는 힘을 얻었다.

―김민지 대표의 「어쩌다 장수청년」 中


영화로 지역의 가치를 전하다

장수 '섶밭들산골마을영화제'



장수의 작은 시골 마을이 사람들로 북적인다. 산으로 산삼을 캐러, 호수로 낚시하러 떠나는 사람들. 길거리엔 '낮술 포차'가 열리고, 전통주를 마신 사람들은 흥에 취해 민요를 부른다. 언뜻 보면 대학생들의 '농활'이 떠오르기도 하는 이 풍경은 사실 영화제의 한복판이다. 오전에는 취향대로 농촌을 체험하고, 오후에는 작은 영화관에 둘러앉아 영화를 관람한다. 스물다섯 가구가 살고 있는 섶밭들마을, 2년 전부터 이곳에서 '섶밭들산골마을영화제'(하영택 집행위원장)가 열리고 있다.

가장 지역적인 것, 가장 세계적인 것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등 국내에는 수준 있는 국제영화제들이 꽤 있다. 하지만 이러한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도시의 영화제에서는 지역 고유의 색을 느끼기 어렵다. 이와 달리 섶밭들산골마을영화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장수의 색을 고스란히 지킨다. 마을 주민들이 영화제를 주도하고, 관객들은 주민들과 함께 일상을 나눈다. 로컬 문화에 대한 굳건한 믿음에서 나오는 도전장이다.

2021년 초대 영화제는 강원도 인제의 '끄트머리국제마을영화제'와 함께 기획·운영했다. 프로그래밍과 감독 초청 등은 끄트머리국제마을영화제에서 진행하고, 섶밭들마을 사람들은 숙식과 농촌 체험을 책임졌다. 이탈리아와 헝가리 등에서 찾아온 외국 감독들은 장수를 온전히 느끼며 그들이 바라보는 작은 마을에 대한 기록을 영화로 남겼다. '로컬리즘' 전략을 증명하듯 영화제는 큰 호평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며, 2023년에는 섶밭들마을 자체적으로 집행위원회를 꾸리고 규모를 대폭 확대했다.

새롭게 시작된 영화제의 기본 전제는 '마을 주민이 구경꾼이 아닌, 어떤 형태로든지 참여하는 것.'이었다. 12명의 집행위원 중 7명이 마을 주민으로 구성되었으며, 가을에 열리던 영화제는 주민들이 바쁜 농번기를 피해 여름으로 옮겨졌다. 4박 5일의 영화제 기간 주민들은 관객들의 숙식을 책임지는 호텔리어이자 농촌 체험 프로그램의 운영자가 되었다. 국비를 받아서 마을 사업을 해본 경험이 있는 집행위원장이 예산 관리와 같은 행정 업무를 맡았고, 오랜 시간 해외에 살았던 경험이 있는 귀촌 주민은 번역과 통역을 담당했다.

“전 세계 영화제의 출품 공모가 올라오는 플랫폼이 있어요. 거기에 공지를 했죠. 우리는 가장 한국적인 영화제다. 한국까지 오기만 하면 우리가 먹여주고 재워주고 한국을 체험시켜 주겠다, 이렇게요. 30일간 공모를 했는데 109개국 1,203편이 들어왔어요. 예상보다 폭발적인 반응에 집행위원들이 엄청나게 흥분했던 기억이 나요.”

영화제 기간 마을에는 단기 하숙도 진행되었다. 혼자 사는 마을 어르신과 대안학교인 '성문밖학교'의 학생들이 짝을 지어 5박 6일을 함께 살았다. 처음에는 낯설어하던 마을 어르신들도 이내 마음을 열고 학생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그 인연이 이어지며 지난가을에는 마을을 다시 찾아 김장을 하고 가기도 했다.

“3~4개월 전부터 그 대안학교에 가서 기본적인 영화 수업을 해줬어요. 그걸 바탕으로 학생들이 영화제 기간 직접 '아이들이 바라본 마을 사람들'을 주제로 영상을 두 편 만들었어요. 폐막작으로 상영했는데, 너무 좋았어요. 학생들과 어르신들이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과정들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거든요. 얼마나 친해졌는지 헤어질 때 운 사람들도 많아요.”

영화제 일로 밤을 새우느라 힘들었다며 고개를 흔드는 서용우 사무국장이지만, 인터뷰 내내 영화제와 마을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사실 그는 2009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는, 본업이 따로 있는 전문 영화인이다. 아무 연고가 없던 장수에 매주 내려오게 된 사연은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미디어 교육을 부탁받고 격주에 한 번 오기로 했던 장수. 처음 계획과는 달리 매주 내려와 주민들과 함께 어울리며 벌써 다섯 편의 마을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이제 영화제까지 하고 있다. 장수에서 도망가기(?) 힘들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역시나 2024년부터는 아예 내려와 살 계획이라고 한다.



문화를 이끄는 마을 공동체

섶밭들마을의 밑바탕에는 조선시대 혁명적 지식인이었던 정여립의 '대동사상'이 있다. 보수적인 유교사회에서 '모두가 함께 어울리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창했던 정여립. 그의 주 활동지였다는 천반산이 섶밭들마을의 뒷산이다. 그래서인지 유독 이 마을에는 공동체 문화가 활성화되어 있다. 아무나 들어와 정을 담는 공간이라는 뜻의 무인카페 '아무정', 전통 술을 빚는 '味술관' 등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모여 활동하는 공간들이 많다. 영화제의 공간으로 섶밭들마을을 선택한 이유도 정여립과 마을 특유의 공동체 문화에 있다.

영화제 또한 정여립의 대동 정신을 따른다. '평등'과 '공존'의 주제를 담은 영화들을 상영하였으며, 그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한 영화에는 정여립의 본관인 동래 정씨 문중의 후원을 받아 '여립상'을 시상했다. '정여립'을 중심으로 한 마을의 이야기는 곧 영화제의 정체성이 되었다.

앞으로도 계속될 영화제를 위해 천반산이 잘 보이는 마을 한 구석에 '공간 여립'이 만들어지고 있다. 40~50명의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영화관으로, 기본적인 스크린과 음향 장비부터 관객들이 묵을 수 있는 숙소까지 구비된 작지만 알찬 공간이다. 영화를 상영하지 않을 때는 누구나 와서 쉴 수 있는 마을의 공유 공간으로 활용하여, 마을 주민들과 함께 재미난 일들을 벌여나갈 계획이다.

고다인 기자/류나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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